정부와 여당이 30일 형법상 배임죄를 폐지하겠다는 입장을 확정하자 재계에서는 “늦었지만 환영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배임죄는 1953년 대한민국 형법 제정 당시 도입된 후 72년간 벌금 금액 조정 외에는 단 한 차례의 개정 없이 유지되며 기업 경영 활동을 옥죄는 독소 조항으로 꼽혀왔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미 국회를 통과한 2차 상법 개정안(더 센 상법)에 이어 여당이 추진 중인 3차 개정안(더 더 센 상법)까지 대기하고 있어 기업들이 맞닥뜨린 경영 불확실성이 여전하다는 우려도 나온다.
배임죄 폐지 등 경제 형벌 합리화 방안의 핵심은 기업과 경영자에 과도하게 부과되는 형사책임을 조정하는 것이다. 기업인은 물론 영세 소상공인들까지도 단순한 실수나 규정 미숙지 때문에 형사 처벌까지 받을 수 있다는 게 현재 법체계의 문제점이었다.
특히 배임죄 폐지는 기업인들에게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변화다. 배임죄는 타인의 사무를 맡은 사람이 그 임무를 위반해 본인에게 재산상 손해를 입히고 제3자가 이득을 얻게 하는 경우 처벌하는 조항이다. 이 때문에 이사회 의사 결정이나 투자 판단이 사후적으로 문제가 될 경우 배임죄 혐의로 이어지면서 기업인들이 형사처벌을 받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당정은 1년 안에 경제 형벌 규정의 30%를 정비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번 방안을 마련했다. 전체 6000여 개 규정 중 배임죄 폐지를 포함해 약 110개(1.6%)가 우선 정비 대상에 포함됐다. 이번에 선정된 110개 과제는 △배임죄 개선을 포함한 선의의 사업주 보호(3개) △형벌 완화 및 금전적 책임성 강화(3개) △경미한 위반 행위의 과태료 전환(68개) △선행정 조치, 후형벌 부과(18개) △존치 필요성 낮은 형벌 폐지(18개) 등으로 구성됐다.
정부는 특히 일상 속 사소한 실수로 형사처벌 대상이 되는 관행을 대거 손질하기로 했다. 예를 들어 트럭 짐칸(적재함) 크기 변경 등 경미한 튜닝을 할 경우 현재는 최대 1년 징역이나 최대 1000만 원의 벌금이 부과되지만 앞으로는 시정 명령과 함께 최대 1000만 원의 과태료로 바뀐다. 미용실을 운영하면서 상호명을 바꾸고 구청에 변경 신고를 깜빡하면 지금은 최대 징역 6개월에 처할 수 있지만 앞으로는 과태료 100만 원만 내면 된다. 구내식당을 운영하면서 조리사를 잠깐 고용하지 못한 경우 처벌이 징역 3년에서 1년으로 줄어들고 비료 봉지가 습기로 찢어진 상태로 팔았을 때 징역 2년에서 과태료 200만 원으로 경감된다.
정부 규정들도 손질된다. 공정거래법상 시장 지배적 사업자가 다른 사업자의 활동을 부당하게 방해한 경우 지금까지는 곧바로 최대 징역 3년, 벌금 2억 원의 형사처벌을 받았으나 앞으로는 공정위 시정 명령을 내린 뒤 불이행 시에만 형벌을 부과한다. 기획재정부는 은행이 고객의 외환 거래가 합법인지 확인하지 않았을 때 징역 1년까지 처할 수 있던 규정을 폐지하는 대신 위반으로 얻은 이익의 40% 이하 과징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형벌을 줄이는 대신 과징금 등 금전적 부담은 늘리는 방향으로 법 개선도 진행한다. 가령 정부는 선박 보험 조합 임원이 조합의 돈을 부당하게 배당할 경우 현재 7년인 징역을 3년으로 줄이는 대신 피해액의 2배까지 배상하게 만든다. 배달로봇의 부품을 사전 승인 없이 경미하게 조정할 때 징역 3년을 물렸던 처벌 조항도 과징금 5000만 원으로 조정했다. 정부는 이번 개선안을 법으로 만들어 이번 정기국회에 제출하고 10월 이후 2차 방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하지만 이 같은 경제 형벌 합리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의 경영 환경은 여전히 안갯속이라는 평가도 많다. 여당이 추진 중인 3차 상법 개정안은 더 강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소액주주가 이사·감사 선임과 해임을 제안할 수 있는 요건이 대폭 완화되고 사외이사 및 경영 성과 관련 안건을 쉽게 상정할 수 있는 방안이 추진된다. 모회사 주주가 자회사 이사를 상대로도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다중대표소송제’ 도입도 논의되고 있다. 김용진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배임죄 폐지는 기업 경영의 독립성 확보 측면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며 “다만 배임죄 외에 기업 경영의 불확실성을 키우는 요인들을 추가로 발굴해 해결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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