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기술(IT) 개발사와 운영사를 분리해 공공 프로젝트를 맡기는 정부 관행 탓에 국가 전산망 이중화 작업이 지연된 것으로 파악됐다. 행정안전부 산하 국가정보자원관리원 대전 본원 화재 이전에 재난 상황에 대비한 이중화 계획까지 세워졌지만 클라우드 서비스에 부적합한 제도 때문에 국가 전산망 마비 사태에 대응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셈이다.
30일 IT 업계에 따르면 국내 클라우드 기업 오케스트로는 2024년 전자정부클라우드플랫폼 4차 구축 사업을 통해 국정자원의 차세대 통합운영관리시스템 ‘nTOPS 3.0’을 설계, 개발했다. nTOPS 3.0은 대전·광주·대구 센터에 혼재돼 있던 국정자원 운영 관리 시스템을 통합하고 클라우드 기반 운영 체계를 고도화하기 위한 시스템이다.
하지만 오케스트로는 올해 7월에야 nTOPS 3.0 운영 및 유지 관리에 대한 우선협상자로 선정됐다. 소프트웨어 개발사와 운영사를 분리 발주하는 정부의 보수적인 관행으로 인해 계약 절차가 길어졌기 때문이라는 게 업계의 판단이다. IT 업체가 개발을 마친 후 정부 체계에 맞는 최적화나 검수 작업을 진행한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국가 전산망 이중화 계획도 nTOPS 3.0가 본격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한 뒤에야 잡혔다. 국정자원 측은 오케스트로에 대전 본원과 공주 센터 간 이중화 체계 구축 프로젝트도 맡겼는데 오케스트로의 멀티클라우드 기술력을 높게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프로젝트에는 시나리오 기반 모의훈련 등 재난복구(DR) 체계 구축도 포함됐다. DR 시스템이 구현되면 두 센터가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주고받다 한쪽에 장애가 발생해도 다른 쪽이 즉시 서비스를 이어받을 수 있다.
하지만 최근 대전 본원 화재로 이중화 계획은 그대로 추진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대전 본원 외 나머지 센터의 설비 조정 결과에 따라 공주 센터 내 백업·복구 시스템 변경이 불가피하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와 관련해 이용석 행안부 디지털정부혁신실장은 전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브리핑에서 “공주 센터는 올해 일부 소산 데이터(여러 장소에 분산·저장된 데이터)에 대해 백업 기능을 하고 있다”면서 “공주 센터가 완료됐어도 목표하는 DR 시스템을 구축하려면 내부에 추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IT 업계에서는 정부가 애초에 nTOPS 3.0 개발·운영 발주를 한 번에 진행했다면 DR 체계를 비롯한 새로운 시스템 도입에 걸리는 기간을 상당히 단축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소프트웨어 업체의 한 관계자는 “민간 업체 입장에서는 개발보다는 유지 보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수익이 훨씬 장기적인 만큼 공공 개발 프로젝트만 수주하는 것은 정부와의 신뢰 관계를 쌓는 데만 의의가 있다”면서 “정부의 분리 발주 관행 탓에 공공 시장에 진출 자체를 꺼리는 기업도 많다”고 지적했다. 분리 발주 문제로 공공 소프트웨어 도입에 걸리는 기간 자체가 길어질 뿐만 아니라 프로젝트 유찰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얘기다.
물론 행안부도 이러한 관행의 문제점을 고치고자 클라우드 네이티브 지원 사업에 대해서는 개발·운영 일괄 발주 원칙 아래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했지만 이번 화재로 결국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됐다. IT 업계 관계자는 “분리 발주 관행은 당초 대기업의 독식을 막기 위해 굳어졌는데 아마존웹서비스(AWS),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 해외 빅테크 기업이 국내 클라우드 시장에 진출한 상황에서 오히려 국내 클라우드 기업의 공공 시장 진입을 막는 족쇄로 작용할 수 있다”면서 “인공지능(AI) 시대에 걸맞은 클라우드 산업 조성을 위한 정부의 체계적인 정책 수립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김대종 세종대 교수는 “국가 전산망은 국민 생활과 안보에 직결되는 핵심 인프라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태에서 데이터 이중화 체계가 미흡했던 것은 정부의 위험 관리 실패라고 평가할 수 있다”면서 “특히 개발사와 운영사를 분리해 발주하는 관행은 책임 소재를 불분명하게 하고 장애 대응을 늦추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앞으로는 데이터 이중화와 삼중화, 개발·운영 일괄 책임제, 재난 대응 모의 훈련 등을 통해 근본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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