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그룹은 그동안 미국 시장에서 가격 인상을 억제하며 점유율을 꾸준히 늘려왔다. 경쟁 차종보다 조금이라도 낮은 가격대를 유지하며 현지 소비자들을 공략하는 전략이다. 현대차(005380)의 베스트셀링카이자 준중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투싼이 대표적이다. 현재 투싼의 미국 판매가격은 2만 9200달러(약 4080만 원)로 경쟁 차종인 폭스바겐 티구안(3만 245달러·4234만 원)과 도요타 라브4(2만 9800달러·4172만 원)에 비해 1~3%가량 저렴하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일본에 이어 유럽산 자동차에 대한 관세까지 기존 27.5%에서 15%로 낮추면서 현대차·기아(000270)가 가지고 있던 가격 경쟁력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현대차가 미국의 25% 관세를 그대로 차량 가격에 반영한다고 가정하면 투싼의 가격은 3만 6500달러(약 5112만 원)로 비싸진다. 15% 관세가 적용된 티구안(3만 4782달러·4869만 원)과 라브4(3만 4270달러·4798만 원)의 가격을 뛰어넘는 것이다.
투싼뿐만 아니다. 기본 소비자가격이 4만 8985달러(약 6860만)인 제네시스 GV70은 기본 소비자가격이 1000달러 이상 높던 BMW의 X3보다 3000달러 이상 비싸진다. 현재 울산 공장에서 전량 생산되는 현대차의 소형 SUV 코나와 화성공장에서 생산되는 기아 니로도 같은 차급인 폭스바겐 타오스와 비슷한 가격에서 각각 2300달러, 4300달러 더 높게 책정된다.
지금까지 현대차그룹은 점유율 하락을 우려해 관세에 따른 가격 인상을 억제해왔다. 호세 무뇨스 현대차 사장도 “미국의 관세 부과가 곧바로 미국 내 차량 가격 인상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일단 가격 인상을 자제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더 이상 가격을 유지하기 부담스러운 상황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IBK투자증권에 따르면 현대차·기아가 부담하는 비용은 한 달에 7000억 원에 달한다. 이미 올 상반기에만 1조 6000억 원을 감당한 상황에서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비용을 차량 가격에 일부라도 반영하지 않으면 수익성이 크게 악화할 수밖에 없다. 업계 관계자는 “현대차·기아가 미국 시장 내 점유율 확보를 위해 비용을 짊어지고 있지만 계속해서 버티기는 힘들 것”이라며 “수익성이나 점유율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되는 사면초가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특히 업계에서는 경쟁 업체들이 공격적인 판촉에 나설 경우 현대차·기아의 입지가 더욱 좁아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미국 관세 부과 이후 현지 생산 비중이 낮은 유럽 완성차들은 차량 가격을 지속적으로 높여왔다. 관세가 낮아지면 이미 25% 관세를 가격에 반영해둔 유럽 브랜드들은 단기 할인이나 프로모션으로 경쟁력을 강화할 여력이 생기게 된다. 실제 시장조사기관 콕스오토모티브에 따르면 8월 기준 미국 평균 판매가격은 폭스바겐이 4만 497달러로 전년 대비 8.8% 상승했고 벤츠와 BMW도 각각 7.1%, 5.4% 상승했다. 반면 현대차와 기아는 같은 기간 각각 4.0%, 2.4% 오르는 데 그쳐 상대적으로 가격 인상 폭이 적었다. 유럽 브랜드들이 판매 가격을 낮추거나 공격적인 판촉을 이어가면 현대차·기아는 가격 경쟁에서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완성차 브랜드들이 관세 부과에 맞서 미 현지화에 더욱 속도를 내면서 경쟁 환경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볼보차는 현지 생산 비율을 2030년까지 50% 이상으로 끌어올릴 계획이고 벤츠는 2027년부터 앨라배마주 터스컬루사 공장에서 E클래스 등 핵심 차종을 생산한다. 현대차그룹 역시 현지 생산량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있지만 생산 능력을 얼마나 빠르게 올릴 수 있는지가 관건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현대차그룹의 미국 판매량 중 현지 생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42% 수준에 불과하다. BMW(48%), 도요타(49%), 혼다(65%) 같은 경쟁사들과 비교하면 다소 낮아 그만큼 관세 영향을 더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 미국의 관세 폭탄으로 한국 자동차 수출은 올해 1~7월 기준 지난해 동기 대비 15.1% 감소한 182억 달러(약 25조 원)에 그쳤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일본에 이어 유럽에 대한 자동차 관세까지 사라지면서 현대차그룹이 최대 수출국이던 미국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고 있다”며 “한 번 영향력을 상실하면 회복하기 어려운 산업 특성을 고려해 한국 정부가 미국과의 협상에 속도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