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지오센트릭과 대한유화 사이의 나프타분해시설(NCC) 구조조정 논의가 지지부진합니다. 투자은행(IB)업계에서는 중단됐다는 말도 나오는데 SK는 "서로 눈치보기 중"이라며 협상이 깨진 것은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사실 정부가 석유화학업계의 구조조정을 요구하고 나섰을 때 울산은 에틸렌 생산능력이 여수나 대산보다 훨씬 적고 관계 기업도 SK지오센트릭과 대한유화, 에쓰-오일 밖에 없어서 논의가 쉬워질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현재 구조조정 논의는 가장 뒤쳐져 있습니다.
울산 지역 석화산업 구조조정이 늦어지는 데는 무엇보다 각 기업들의 구조조정에 대한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SK는 최근 들어 올레핀 국제 가격이 다시 상승하는 등 업황이 다소 개선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고 뒷배가 든든한 상태에서 굳이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설비를 넘길 이유가 없다고 합니다. 대한유화도 마찬가지인데, 사실 대한유화의 올해 실적은 좋치 않습니다. 상반기까지 144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워낙 보수적으로 경영을 하는 대한유화의 경영 특성 상 버텨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하는데요 일각에서는 대한유화의 계열사 중에 전력 유틸리티 관련 사업을 하는 기업이 있는데 이 곳의 실적이 나쁘지 않아 대한유화 전체 상황도 아주 나쁜 것은 아니라고 하는 얘기도 들립니다.
여기에 '복병'이 에쓰-오일입니다. 에쓰-오일은 현재로서는 에틸렌 연간 20만 톤 정도를 생산하고 있지만 내년 말이면 샤힌 프로젝트가 가동되면서 180만 톤이 더해져 울산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에틸렌 생산 업체가 됩니다. 애초 정부의 구조조정 발표 때에는 설비가 없는 만큼 에쓰-오일은 논외가 됐습니다. 그런데 SK와 대한유화 입장에서는 속이 쓰립니다. 당장 과잉 공급이 문제인데 내년이라고 하더라도 180만 톤을 더 생산하는 기업을 제외하고 구조조정을 논의하라고 하니 말이죠.
그래서 SK와 대한유화의 협의 과정에서 에쓰-오일까지 참여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고, 일단 에쓰-오일도 협상 테이블에는 앉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에쓰-오일 입장에서는 급할 게 없죠. 당장 줄여야 할 설비도 없는데 다가 특히 에쓰-오일은 생산한 올레핀을 국내 시장에 풀 생각이 없다고 했습니다. 전량 수출하겠다는 것인데요. 업계에서는 이 말에도 의구심을 갖습니다. 에쓰-오일이 짓고 있는 설비는 COTC(Crude oil into Chemicals)라고 원유에서 바로 석유화학제품을 뽑아내는 시설입니다. 국내에 첫 도입됐는데 NCC보다 훨씬 생산비가 적게 듭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샤힌 프로젝트의 모두가 COTC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40% 정도라며 나머지 60%는 NCC라는 이유를 들며 일부가 국내 시장에 흘러들어올 수 있다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에쓰-오일도 구조조정에 발을 담가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SK와 대한유화의 협의가 잠정 중단되기는 했지만 완전히 깨진 것은 아닙니다. 정부가 뒤에 서 지켜보고 있는데 쉽게 깰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업계의 이해 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만큼 협의가 원활하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당근'도 필요합니다. SK는 대한유화에 설비를 매각하거나 넘기지 못하면 결국 스크랩(철거)까지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자의가 아닌 우리나라 석유화학산업 전체를 생각하는 차원에서 철거를 결정하는 일인데도 철거비용은 물론 환경정화비용까지 SK가 부담해야 합니다.
이런 문제도 있다고 합니다. 국내 공정거래법 상 손자회사가 증손회사를 둘 경우 100% 지분을 확보해야 하는데 대한유화와 SK가 협의 중인 조인트벤처로 시설을 통합할 경우 SK는 이 회사의 100%를 확보할 수 없습니다. 대한유화와 지분을 나눠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업활력법이라는 것이 있어 정부의 승인을 받으면 법 적용이 유예되기는 하지만 대기업에 적용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컨대 정부가 구조조정에 나서는 석유화학업체에 이 법을 적용시키겠다고 약속만 하더라도 기업의 부담이 확 줄어들겠죠.
여수와 대산에서도 석유화학기업들의 물밑 협상이 한창입니다. 국내 최대 석화 산단인 여수에서는 GS칼텍스과 LG화학(051910), 롯데케미칼(011170)이 협상 카드를 맞추고 있습니다. 최근 LG화학이 GS칼텍스를 향해 여수 NCC를 매각하고 합작회사를 설립해 NCC를 통합 운영하자는 제안을 했고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 중입니다. 최근에는 관련 내용을 산업통상자원부에 보고를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정부가 의도하는 정유-석유화학 수직 계열화에도 부합합니다. 하지만 속내는 조금 다르다고 합니다. GS가 LG의 NCC를 운영하면서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고 하더라도 LG가 다운스트림 제품 생산에 GS가 생산한 기초 유분을 사용할 지, 얼마나 공급 받을 지가 중요한데 이런 부분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논의가 진전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여천NCC도 구조조정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아직 뚜렷한 움직임은 없습니다. 한화와 DL간의 제품 공급 가격 협상이 일단락된 후라야 구조조정 논의도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대산에서는 롯데케미칼과 HD현대케미칼이 정유 시설을 갖춘 HD현대오일뱅크와 합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지만 자산 평가 등의 문제가 있어 아직 평행선을 달리고 있습니다. HD현대와 롯데케미칼 측에서 LG화학도 대산에 크래커가 있는 만큼 함께 논의하자고 협상 테이블에 앉히려고 한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자율 구조조정을 시작은 했지만 이들 기업들은 내심 정부가 원활한 구조조정을 위해서는 지원을 더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속도를 낼 수 있다는 것인데요.
사실 석유화학산업은 국가 기간 산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공급이 넘친다고 하더라도 무작정 줄일 수만은 없습니다. 또 한국 기업만 물량을 줄인다고 글로벌 시황이 나아지지는 않을 거라고 합니다. 물론 구조적인 공급 과잉 상태를 바꿔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어 보입니다. 다만 업계의 자율에만 맡겨서는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힘들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일단 논의는 시작됐으니 정부가 막힌 혈을 뚫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 기업들의 입장입니다. 기업 간 합의안이 빠른 시일 내에 나오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적어도 10월 말 이후에나 그림들이 그려질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