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이 1480원을 돌파하는 등 고환율 기조가 이어지면서 '커렌크라이시스(currency+crisis·환율 위기)'의 먹구름이 기업을 드리우고 있다. 글로벌 경기 침체로 업황이 악화한 가운데 원화 가치 하락으로 원자재 수입 가격이 상승하고 해외 투자 비용도 증가하면서 실적에 직격탄을 맞을 위기다.
30일 서울경제신문이 국내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5년 경제·경영환경 조사’에 따르면 국내 기업들이 감내할 수 있는 적절 원·달러 환율은 1390.84달러로 이미 감내 수준을 80원가량 넘겨버린 상황이다. 응답자의 43.6%는 내년 원·달러 환율이 1400~1450원에 이를 것이라고 예상했고 1350~1400원이 31.6%, 1450~1500원이 17.8% 순이었다.
환율이 적정 수준 이상으로 상승(원화 약세)할 때 영향을 묻는 질문에 46.5%는 '원자재 수입비용 증가로 이익이 감소한다'고 답했다. '해외 시장 가격경쟁력 개선으로 이익이 증가한다'는 응답은 31.7%였다. 역으로 환율이 적정 수준 이상으로 하락(원화 강세)할 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선 '원자재 수입비용 감소로 이익 증가'가 47.6%로 가장 높은 응답 비율을 보였고 '해외 시장 가격경쟁력 악화로 이익이 감소한다'는 응답은 30.7%였다.
이는 과거 환율이 높아지면 수출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져 국내 기업에 유리하다고 평가됐던 상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이제는 ‘환율이 상승하면 이익이 감소한다’는 응답이 ‘이익이 증가한다’는 응답보다 14.8%포인트 많다. ‘환율이 하락하면 이익이 증가한다’는 응답도 반대보다 16.9%포인트 많다.
실제 수출 비중이 많아 고환율 이득을 볼 것으로 보이는 반도체와 배터리 업계조차 실익을 가늠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당장 제품을 더 높은 가격에 팔 수 있지만 실리콘, 희토류, 텅스텐, 리튬, 흑연 등 원자재 구입 부담이 커지면서 수익성이 더 악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삼성전자(005930)와 SK하이닉스(000660)를 비롯해 LG에너지솔루션(373220), 삼성SDI(006400), SK온 등은 미국에 대규모 공장을 신·증설하고 있기 때문에 시설 투자 및 장비·설비 반입 비용도 더 가중될 수밖에 없다. 가령 삼성전자의 경우 170억 달러를 들여 미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첨단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공장을 짓고 있는데 원·달러 환율이 200원 오른다고 가정하면 3조 원 이상의 비용 부담이 발생할 수 있다.
업종별로 환율 상승으로 인한 영향을 살펴보면 건설업과 제조업은 ‘원자재 수입비용 증가로 이익 감소’ 응답이 각각 55.6%, 45.9%로 가장 높았다. 운수 및 창고업과 정보통신업은 ‘원자재 수입비용 증가로 이익 감소’와 ‘해외 시장 가격경쟁력 개선으로 이익 증가’ 영향이 33.3%로 동률을 이뤘다. 환율 하락으로 인한 영향 또한 건설업과 제조업이 ‘원자재 수입비용 감소로 이익이 증가한다’는 응답이 각 66.7%, 50.0%로 컸다. 다른 산업보다 건설업과 제조업이 환율 변화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것이다.
건설업은 강달러일 경우 철근과 콘크리트 등 수입 원자재 가격이 오르면서 공사비 상승을 맞게 된다. 수입 원료 비중이 높은 철강·석유화학 산업은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셧다운(가동 중단) 규모가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포스코는 이미 수익성 악화 등을 이유로 7월 포항 1제강 공장을, 11월 포항 1선재 공장을 각각 폐쇄했다. 현대제철도 포항 2공장 폐쇄를 진행 중이다. 철강업의 경우 철광석과 원료탄 등 전체 원재료에서 수입 비중이 90% 이상에 달한다. 글로벌 철강공급 과잉 현상과 강달러 현상이 장기화된다면 부가가치가 낮은 제품군을 대상으로 추가 공장 폐쇄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
주요 원료인 나프타를 100% 수입해야 하는 석화 산업도 고환율의 직격탄을 맞는 업종이다. 업체들은 나프타를 달러로 수입해 에틸렌, 프로필렌 등 제품을 만든다. 현재 대표적 수익 지표인 에틸렌 스프레드(에틸렌에서 나프타를 뺀 가격)는 손익분기점인 톤당 300달러를 크게 밑돌고 있다. 업체들은 기초제품 생산하는 공장을 멈추고 가동률을 줄이면서 적자에 대응하고 있지만 상황을 반전시킬 뾰족한 묘수가 없는 상황이다. 석화업계의 한 관계자는 "고환율 장기화는 끝이 보이지 않는 석화 불황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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