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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섭의 테크놀로지로 본 세상] 언제 어디서나...나와 세상, 테크놀로지로 연결되다

< 33·끝 > 연재를 마치며

기술이 닿지 않는 곳은 하나도 없어

우리 삶 속에서 끊임없이 교류·성장

하나의 테크엔 다양한 이야기 가능

사물에 대한 탐색·성찰 기회됐으면

지난 2011년 서울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전주로 가는 길에 마주친 풍경. 테크놀로지가 집약된 서울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지만 이곳에서도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은 단 하나도 없다.




지난 2011년 가을 오랜 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전북대 모 선생님으로부터 학과 학술제를 개최할 예정이니 와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최근 연구 주제에 대한 발표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때는 전주행 KTX가 개통되기 전이었다. 무작정 용산역에 가서 전주에 가장 빨리 도착하는 기차표를 달라고 했다. 그렇게 계획에 없던 무궁화호 열차를 타게 됐다. 덜컹거리며 서울을 빠져나가는 기차를 타고 오래간만의 예기치 않은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탑승하기 전에 산 테이크아웃 커피를 홀짝거리며 책을 읽기도 하고 얼마 전 처음으로 마련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사이 열차는 어느새 수원과 평택을 지나고 있었다.

그러다 언제쯤이었을까.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니 그야말로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급히 스마트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 푸른 하늘에는 조각구름이 드문드문 떠 있었고 널따랗게 펼쳐진 논에는 벼가 노랗게 익어갔다. 배경을 이루는 울창한 야산에는 누군가의 선산인 듯 여러 개의 묏자리가 조성돼 있었다. 작은 개천을 건너는 다리도 있었고, 비닐하우스도 여러 동 눈에 들어왔다. 내가 탄 기차가 지나고 있는 철로에 접한 전경(前景)에는 작은 텃밭이 가꾸어져 있는 모습도 보였다. 오래간만에 마주하게 된 한국적인 색감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천천히 지나가는 모습을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 풍경에 매혹된 것은 아마도 한국 농촌 특유의 분위기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기차가 용산역을 출발해 영등포를 거쳐 수원에 멈춰 설 때까지 단 한순간도 거대 도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듯했다. 영화 ‘매트릭스 2: 리로디드’에서 스미스 요원이 스스로 끊임없이 복제하듯 확장을 거듭하는 ‘대(大)서울’은 행정적인 경계와 무관하게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연상시키는 네모반듯한 고층 아파트 숲은 천안을 지날 때까지 끊임없이 나타났다. 그러다 이윽고 지친 눈을 편안하게 해 주는 풍경을 만나게 됐으니 반가울 수밖에. 하지만 이 ‘토속적’인 풍경에서조차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 역설이라면 역설인 셈이다. 즉, 기술의 풍경은 어디에나 있고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5월의 청명한 하늘 아래 펼쳐진 경복궁 일대의 모습. 북한산으로부터 이어지는 자연녹지와 고궁, 현대 건축물들이 어우러지면서 테크놀로지가 우리의 세상을 어떻게 연결하고 변화시켜왔는지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지난해 8월 연재를 시작하면서 21세기 초 한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 자체가 각종 테크놀로지로 직조돼 있음을 지적했다. 이후 지금까지 30여회에 걸쳐 일상생활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여러 사물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 이야기들은 다분히 의식적으로 1970년대 중반 서울의 한 중산층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비교적 순탄하게 살아온 한 사람의 눈을 통해 본 테크놀로지의 풍경이었다. 돌이켜보면 익숙하고 안온한 가정을 넘어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한 것은 1979년 무렵이 아니었나 싶다. 그해 가을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소식이 한국을 뒤흔들었다. 그의 장례식 장면을 미닫이문이 달린 흑백 TV를 통해 지켜보며 무언가 큰일이 났다고 느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후 나의 일상생활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세상은 TV라는 기술적 매체를 통해 나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

그동안 이 지면을 통해 내가 썼던 글들은 대단히 초보적인 형태의 ‘자기민속지(autoethnography)’의 일종으로 볼 수도 있다. 인류학자들이 낯선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원주민들 사이에서 참여 관찰하듯 나는 스스로를 탐침(探針)으로 삼아 내가 세상을 인지하기 시작한 1980년대 이후 현재까지 한국 기술의 풍경의 한 단면을 포착하려 했다. 내가 특정 시점에 경험한 테크놀로지는 어떤 과정을 거쳐 그 자리에 놓이게 됐는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당하는 테크놀로지의 연원과 진화, 그리고 그것이 한반도에 어떤 과정을 거쳐 들어오게 됐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탐구는 한 개인의 사적 경험을 객관화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한국인이 경험하는 기술의 풍경이 주변 지역과 끊임없이 교류하며 형성됐음을 알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사실 이러한 종류의 글쓰기는 얼마든지 반복할 수 있다. 우리 주변에 얼마나 다양한 사물이 존재하는가. 인간의 눈을 일종의 생체 카메라로 본다면 내가 살아온 40여년 동안 나의 프레임 안에 잡혔던 테크놀로지는 끝없이 나열할 수 있다. 지난 9개월 동안 32개의 주제를 다뤘지만 지면과 시간만 주어진다면 50편, 100편 이상도 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당연하게도 한 사람의 시선을 통해 포착할 수 있는 기술의 풍경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드라마로도 성공을 거둔 최규석 작가의 웹툰 ‘송곳’의 등장인물인 고구신 소장의 말을 빌리면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진다”. 9개월여간 이어졌던 필자의 연재는 6월을 앞두고 이번 편에서 마무리를 짓는다. ‘테크놀로지로 본 세상’은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사물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하는 것으로 하나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보다 참신한 관점에서 나와는 전혀 다른 기술의 풍경을 그려낼 수 있는 필자의 출현을 기대해본다.

5월의 청명한 하늘 아래 펼쳐진 경복궁 일대의 모습. 북한산으로부터 이어지는 자연녹지와 고궁, 현대 건축물들이 어우러지면서 테크놀로지가 우리의 세상을 어떻게 연결하고 변화시켜왔는지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지금까지 살펴봤듯 테크놀로지가 단순히 주어진 기능을 수행하는 도구에 그치지만은 않는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하나의 테크놀로지에 하나의 이야기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테크놀로지와 관계를 맺고 그를 통해 세상과 연결된다. 이러한 생각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기술사회학자 셰리 터클이 엮은 ‘내 인생의 의미 있는 사물들’이라는 책을 찾아보기 바란다. 이 책의 필자들은 일상생활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사물에 대한 성찰을 통해 테크놀로지가 단순한 도구나 쉽게 대체할 수 있는 양산품(量産品)을 넘어 “나와 세상을 이어주는 끈”이 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말했듯이 우리를 둘러싼 물질문명의 계보를 탐색해 따져보는 것은 결국 내가 누구인지, 내가 속해 있는 크고 작은 공동체가 무엇인지를 묻는 일이다.

대학에 근무하는 기술사(技術史) 전공자로서 나는 평소에 수십명, 많아야 수백명 정도의 독자를 기대할 수밖에 없는 학술논문을 쓰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테크놀로지로 본 세상’ 연재는 지난 20년 동안 공부해왔던 테크놀로지에 대한 이야기를 개인사라는 렌즈를 통해 풀어서 써보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이제 잠시 동안의 외유를 마치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때다. 하지만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 2011년 가을 타게 된 호남선 무궁화호 열차는 수많은 역에서 멈춰선 끝에 3시간 반 만에 마침내 전주역에 도착했다. 발표 시간에 맞게 전북대 캠퍼스에 도착해 무사히 발표를 마치고 다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갔다. 초대해주신 선생님께서는 무궁화호를 타고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크게 웃으시며 돌아갈 때는 꼭 고속버스를 타라고 신신당부했다. 고속버스를 타면 훨씬 빠르다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여유 있게 저녁을 먹고 전주고속터미널에서 우등고속버스를 타고 빠르고 편안하게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가는 길에는 완행열차로 풍경을 만끽하며 갔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최대한 신속하게 돌아올 생각이다.

/서울과기대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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