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제약·바이오 산업이 질적 도약을 이뤘다는 증거는 단순 기술수출 규모 외에도 곳곳에서 드러난다. 글로벌 빅파마들과의 기술이전 계약으로 평균 계약 규모가 커졌을 뿐 아니라 미국 식품의약국(FDA) 허가를 받아 상업화에 성공한 사례가 속속 나오고 있고 최근에는 국내 기업에 지분 투자를 하는 빅파마까지 등장했다. 신약 개발 플랫폼으로 대표되는 지속 가능한 사업 모델을 구축하는 한편 각 기업이 경쟁력을 가진 특정 기술에 집중한 전략이 주효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16일 서울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의 기술수출 평균 계약 규모는 2017년 약 1억 5000만 달러(약 2183억 원)에서 올해 8억 4000만 달러(약 1조 2226억 원, 이날 기준)로 약 5.6배 증가했다. 올해 이뤄진 조 단위 기술수출 계약의 대상이 글로벌 빅파마들에 집중됐다는 것도 특징이다. 일라이릴리가 올해에만 올릭스·알지노믹스·에이비엘바이오(298380)와 계약을 체결했고 아스트라제네카(알테오젠(196170)), 글락소스미스클라인(에이비엘바이오), 베링거인겔하임(에임드바이오) 등도 국내 바이오 기업과의 계약 대상에 이름을 올렸다.
기존에 체결했던 기술이전 계약들이 올해 실질적인 결실을 맺은 데도 주목할 만 하다. 지난해 유한양행이 개발한 ‘렉라자’에 이어 올해 알테오젠의 피하주사 제형 변경 플랫폼 기술이 적용된 ‘키트루다 큐렉스’가 미 FDA 허가를 받았다. 키트루다 큐렉스가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면 알테오젠의 로열티 수입은 1조 원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렉라자와 존슨앤드존슨(J&J)의 ‘리브리반트’ 병용요법은 이달 7일 미국종합암네트워크(NCCN) 가이드라인에 1차 치료 선호요법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NCCN이 최신 임상 자료 등을 토대로 발표하는 이 가이드라인은 미국 내 항암제 처방의 지침으로 처방 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국내 기업의 신약을 도입한 글로벌 기업들의 몸값이 상승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디앤디파마텍으로부터 비만약 후보 물질 6종을 도입한 뒤 화이자에 인수된 멧세라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화이자가 100억 달러를 들여 멧세라 인수를 결정한 뒤 멧세라의 주가는 첫 인수 발표 이전(33.32달러) 대비 2배가 넘는 수준이다. 국내 기업 에이프릴바이오로부터 자가면역질환 신약 후보 물질 ‘EVO301(APB-R3)’을 최대 4억 7500만 달러(약 6570억 원)에 도입한 에보뮨은 최근 나스닥 상장에 성공한 직후 공모가 대비 26.44%의 주가 상승률을 보이기도 했다.
신약 개발 플랫폼 기술은 올해 최대 규모 기술이전 성과의 주된 배경으로 꼽힌다. 올해 기술이전 계약의 약 70%는 플랫폼 기반 계약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에이비엘바이오는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 및 일라이릴리와 각각 ‘그랩바디-B’ 플랫폼을 기반으로 기술이전 계약을 체결했다. 그랩바디-B는 약물이 뇌혈관장벽(BBB)을 쉽게 통과할 수 있도록 해준다. 알테오젠도 정맥주사(IV) 약물을 피하주사(SC)로 바꿔주는 ‘ALT-B4’ 플랫폼 기술을 기반으로 아스트라제네카의 자회사 메드이뮨과 13억 달러(약 1조 9000억 원)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다.
이러한 플랫폼 기술은 ‘로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는 장점을 갖는다. 특정 약물이나 질환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 적용할 수 있어 사업 확장성이 높은 데다 신약과 비교하면 연구개발(R&D) 비용이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이다. 기술수출 기업 입장에서는 개발 초기 단계부터 기술이전 계약을 통해 현금 흐름을 확보할 수 있어 한층 유리하다.
일회성 계약에 그치는 신약 물질 계약과 달리 계약을 체결할수록 오히려 가치가 높아진다는 것도 신약 플랫폼 기술의 특징이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그만큼 플랫폼의 가치가 검증된 것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알테오젠을 비롯해 리가켐바이오(141080)사이언스·에이비엘바이오 등도 초기에는 상대적으로 낮은 금액의 기술이전 계약을 체결한 뒤 임상에서 기술력을 증명해가며 플랫폼의 가치를 높였다. 바이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플랫폼 기술을 한 번만 인정받으면 신약을 업그레이드하거나 특허를 방어하기 위한 빅파마들의 관심이 커진다”며 “에이비엘바이오가 릴리의 지분 투자를 받은 데도 릴리의 신약 물질과 접목해 더 고부가가치를 낼 수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고 설명했다.
그 밖에 항체약물접합체(ADC), 리보핵산(RNA) 유전자 치료제 등 하나의 기술에 집중했다는 점도 국내 기업이 경쟁력을 갖게 된 비결로 꼽힌다. 구영권 스마일게이트인베스트먼트 대표는 “중국 바이오 벤처들은 항암제·면역치료제 등 모든 분야에 막대한 자금 투입하지만 독창성 없이 다 비슷비슷하다는 단점이 있다”며 “독창적인 하나의 기술에 선구안을 갖고 투자한 올릭스와 알지노믹스(RNA), 에임드바이오(ADC) 등은 특정 기술에 집중한 결과 성과를 낸 사례”라고 말했다.
내년 상반기까지도 굵직한 기술이전 계약이 체결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크다. 내년 상반기 대사이상지방간염(MASH) 치료제 ‘DD01’의 조직생검 데이터 공개를 앞두고 있는 디앤디파마텍이 대표적이다. 최근 글로벌 수요가 커지고 있는 만큼 데이터가 발표되면 기술이전 가능성이 높아서다. 한미약품도 연말에 MASH 치료제 임상을 종료하고 내년 상반기에 데이터를 공개한다. 최근 5년간 매 4분기에 기술수출 계약을 꾸준히 발표해 온 리가켐바이오가 ADC 플랫폼 ‘콘쥬올’을 기반으로 추가 계약을 체결할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코스닥 시가총액 상위권을 차지한 바이오 기업들의 화려한 성과 이전에는 사업 초기의 어려움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주요 기업들이 실패와 좌절을 거쳐 지금의 성공 사례를 만들어낸 만큼 ‘제2의 알테오젠’ ‘제2의 에이비엘바이오’가 나올 수 있도록 정부가 국내 바이오 생태계를 튼튼하게 만들기 위한 타이밍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며 “초기 바이오 벤처들이 실패하더라도 창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규제 개선으로 신약 허가 과정을 신속화하는 등의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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