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005930)와 SK하이닉스(000660)가 오픈AI의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에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고성능 D램을 공급하기로 하면서 앞으로 대규모 증설이 불가피하게 됐다. 문제는 수십조 원에 달하는 투자비다. 현재 최대 1조 원 정도를 굴리는 기업형 벤처캐피털(CVC)에 대한 규제를 완전히 없앤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막대한 투자비를 감당하기 쉽지 않다. 재계에서 CVC 규제 완화보다 인공지능(AI)·반도체와 같은 첨단산업 투자에 대해 기업이 직접 펀드를 운영하게 하는 등의 보다 전향적인 금산분리 완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2일 업계에 따르면 전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오픈AI의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에 고성능·저전력 메모리를 공급하기로 함에 따라 이들 두 기업이 증설을 위해 투자해야 할 투자금은 최소 40조 원 이상이다. 오픈AI의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는 웨이퍼 기준 월 90만 장에 달하는 고성능 D램이 필요한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공급량은 월 40만 장 정도인 만큼 현재보다 2배 이상의 설비 증설이 필요하다. 업계에서는 대개 웨이퍼 1만 장을 생산하려면 1조 원 정도의 설비 투자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는데 현재 시장점유율을 유지한다고 가정해도 매달 40만 장 정도는 더 생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마저도 업계에서는 최소치로 보고 있다. 오픈AI가 요구하는 고성능 메모리는 대부분 HBM일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패키징 등 후공정 설비까지 늘리게 되면 ‘40조 원+α’가 필요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후공정 설비 구축에 필요한 금액이 D램 생산 시설 투자액보다 1.5~2배가량 많기 때문이다.
문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자금이 여유롭지 않다는 점이다. 삼성전자는 올해 상반기 기준 보유한 현금성 자산만 해도 100조 7300억 원에 달한다. 천문학적인 금액처럼 보이지만 소위 ‘쩐의 전쟁’이라는 반도체 산업의 현실을 보면 그렇지 않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연간 시설 투자 금액만 53조 6000억 원이며 이 가운데 반도체 부문(DS)에 투자한 금액은 46조 3000억 원이다. 메모리반도체는 호황과 불황을 예측해 선제적으로 투자해야 하는 만큼 삼성전자의 현금 보유액도 2년이면 바닥날 수 있다. 이 때문에 삼성전자는 투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계열사인 삼성디스플레이에 손을 벌리기까지 했다. 7월 삼성디스플레이로부터 빌린 20조 원의 자금 대여 기간을 30개월 연장한 바 있다.
HBM 시장을 장악하며 메모리반도체 1위로 올라선 SK하이닉스도 투자금 절벽을 맞을 수 있다는 위기감은 늘 존재한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시설 투자비로 약 17조 9560억 원을 투입했고 올해는 더 늘어 상반기에만 11조 2490억 원이 집행됐다. 하지만 상반기 SK하이닉스가 보유한 현금성 자산은 16조 9620억 원으로 한 해 시설 투자금을 감당하기도 어려운 수준이다. SK하이닉스가 2분기 9조 2000억 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하며 ‘어닝 서프라이즈’를 써가고 있지만 쌓아둔 돈은 많지 않다. 여기에 장기적으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투자하기로 한 금액만 해도 현재 가진 현금성 자산의 7배가 넘는 120조 원에 달한다. 업계 한 관계자는 "여기에 한미 관세협상으로 미국에 투자하기로 한 3500억 달러의 상당 부분을 감당해야 하는데 한 기업이 감당하기에는 큰 규모"라며 "금산분리 규제만 아니라면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에 투자할 금융사가 적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산업계에서는 이재명 대통령의 ‘금산분리 완화’ 발언이 CVC 규제 완화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한국에서도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비전펀드와 같이 기업이 직접 펀드를 운영할 수 있게끔, 자산운용사 정도는 대기업이 겸영할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줘야 한다고 지적한다. 2018년 일본 소프트뱅크의 비전펀드는 모빌리티 기업 우버에 12억 5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불과 20여 일 전에 우버 지분 15% 인수를 발표했던 비전펀드는 총 77억 달러를 우버에 쏟아부으면서 대주주가 됐다. 우버는 비전펀드가 투자한 자금으로 동남아시아와 중동 지역 모빌리티 기업에 재투자하는 한편 자율주행 기술 개발 등에 나섰고 급격하게 성장했다. 비전펀드의 자금이 없었다면 우버의 성공적인 상장도 재무구조 안정화도 없었다는 것이 산업계의 평가다. 일본은 금산분리 규제가 강하지 않기 때문에 비전펀드와 같은 기업이 운용하는 메가펀드가 생길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금융권에서도 금산분리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산업을 잘 아는 기업이 투자 자산을 운용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이유에서다. 지난달 10일 진옥동 신한금융지주 회장도 “금산분리 부분을 완화해 그쪽(산업 쪽)에서 GP 역할을 해준다면 은행권이 같이 들어가 파이가 굉장히 커질 수 있다”며 “아마 셀트리온이 투자를 5000만 원 한다고 하면 은행은 5억 원을 투자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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