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신화의 주역인 권오현 전 삼성전자 회장이 한국 경제가 선진국 문턱에서 정체를 겪으며 여전히 ‘패스트 팔로어(빠른 추격자)’에 머물러 있다고 진단했다. 아직 한국 경제가 선도형이 아니라 추격형에 머물러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기획재정부 중장기전략위원장에 선임된 권 전 회장은 29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열린 ‘제2회 미래전략포럼’에 참석해 “우리나라는 아직도 패스트 팔로어의 연장선상에 머물러 있다”며 “지금이야말로 선진국으로 도약하느냐 마느냐를 가르는 변곡점에 있다”고 말했다.
권 위원장은 “무역 전쟁에서 시작된 것이 관세 전쟁이 되고 이런저런 지역에서 생기는 분쟁으로 세계경제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있다”며 “세계 경제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고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고 진단했다. 이어 “우리나라는 선진국 문턱까지 왔는데 최근에 많은 기업들이 정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신규 사업이나 신생 기업도 탄생되지 않고 있다”고 우려했다. 특히 그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시아의 네 마리 용 가운데 선두 주자였던 한국이 최근에는 조금씩 뒤처지고 있다”며 “우리 마음속에 자리한 작은 자만심 때문에 성장을 못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권 위원장은 삼성전자의 메모리반도체 사업을 글로벌 1위로 도약시킨 반도체 신화의 주역이다.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사장, 대표이사 부회장·회장을 지냈고 2018년 ‘초격차’라는 저서를 펴내 주목받았다. 삼성전자가 세계 1위 반도체 기업에 오른 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서울대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권 위원장은 50년간 한국 경제 고속 성장의 배경으로 정부의 정책·제도, 대학의 인재 양성, 창업자들의 기업가정신 등을 꼽으며 최근에는 이러한 강점이 약화됐다고 분석했다. 그는 “지금이라도 정책과 제도를 잘 설정하고 기업가정신을 다시 활성화하며 대학에서 유능한 인재가 길러진다면 재도약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인공지능(AI)이 우리나라에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며 “새로운 기술을 그저 소개하고 토론하는 데 그칠 게 아니라 AI 기술을 어떻게 사업화할지, 사업화하는 데 걸림돌이 무엇인지, AI 산업을 어떻게 육성할 수 있는지 등을 토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권 위원장은 역대 정부의 정책 연속성 부족 문제도 지적했다. 그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의 일관성이 없다 보니까 기업과 대학이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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