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정대가 현행 금융정책·감독 기구의 체계를 바꾸는 방안을 철회하기로 했다.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지난 25일 국회에서 긴급 고위 당정대 회의 후 브리핑을 열고 "당정대는 당초 신속처리안건으로 처리하려 했던 금융위 정책·감독 기능 분리 및 금융소비자원 신설 등을 이번 정부 조직 개편에 담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금융 감독 체계 개편안을 공식 발표 18일 만이자 이재명 정부 출범 114일 만에 백지화한 것이다. 원래 당정은 금융위원회의 금융정책 기능을 재정경제부로 옮기고 남은 감독 조직은 금융감독위원회로 개편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금융감독원의 금융소비자 보호 기능을 분리해 금융소비자보호원을 신설하는 안도 포함돼 있었다.
업계에서는 “지금이라도 개악을 멈춰 다행”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하지만 금융 정책·감독 분리와 금소원 신설을 두고 시장의 혼란이 극심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부의 정책이 과도하게 오락가락한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금융계에 따르면 당정 최고위 관계자 사이에서 금융 감독 개편안 철회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주 무렵부터다. 당정 내에서는 금융 감독 체계 재편안을 밀어붙일 경우 미국 관세정책 대응과 소상공인 지원, 가계부채 대책, 생산적 금융과 같은 각종 현안 대응이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왔다고 전해진다. 이찬진 금융감독원 원장도 직접 당정 고위 관계자들을 찾아다니면서 금융 감독 개편안에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고 한다.
야당 반대로 개편 전까지 최소 6개월 동안 금융 당국이 사실상 손을 놓고 있어야 하는 점도 고려됐다. 국회 정무위원장이 국민의힘 소속인 상황에서 패스트트랙을 통해 법안을 추진하더라도 내년 4월 이후에나 재편이 완료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금융위는 6·27 부동산 대책을 발표해 이재명 대통령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이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에서도 수차례 일 잘하는 부서로 주목을 받았다. 이 때문에 굳이 정책 누수가 길어질 수 있는 상황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이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실용주의를 강조하는 스타일”이라며 “금융 당국 조직 재편으로 시간을 뺏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짚었다. 정치권의 관계자도 “국정기획위원회에서 대통령실에 금융 감독 체계 개편안을 보고했을 때도 대통령이 이를 수용할지를 두고 의심 어린 시선이 꽤 있었다”고 전했다.
문제는 시장의 혼란이다. 은행과 보험·카드사 등 주요 금융사들은 금융정책의 재정경제부 이관 가능성에 따른 대응 방안 마련에 고심했다. 업계에서는 정책과 감독을 무 자르듯 나누기 어려워 시어머니만 늘어나는 상황이 올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금소원 분리 독립이 가져올 파장에 대한 우려가 컸다. 한 전직 금융 당국 임원은 “소비자 보호(금소원)와 금융 감독(금감원)은 나누기 상당히 어려운 개념”이라며 “외국에서는 오히려 당국을 쪼개다 보니 금융 사고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당국 내 혼란도 적지 않았다. 금감원 직원들은 조직 개편안에 반대해 17년 만에 장외투쟁에 나섰다. 금융위도 사실상 업무 마비 상태에 빠졌다. 정부 조직 개편안에 따른 법안 조문 분리 작업에 새벽까지 야근을 하는 일도 잦았다. 금융 당국의 관계자는 “조직 개편 방침이 나온 후 관련 실무 법률 수정안을 만드느라 매일 새벽 퇴근하는 금융위 직원들도 많았다”며 “금융정책 관련 기본 업무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금융계에서는 이번에 조직 재편안이 철회된 대신 금융 당국 내부 쇄신이 가속화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금감원 내에서는 소비자 보호 기능을 강화하는 내용의 개혁안이 추진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정대 역시 법 개정 사항이 아니더라도 금융소비자 보호 기능의 공공성과 투명성을 제고하는 방안을 우선 마련하기로 했다.
금감원 안팎에서는 각 업권별 감독 부문에 소비자 보호 기능을 추가하는 안이 거론된다. 예를 들어 금감원 내 은행 감독·검사 부문에 소비자 보호 업무를 강화하는 식이다. 금감원 내 금융소비자보호처장에 독자적인 인사권을 부여하는 안도 언급된다. 현재는 금융소비자보호처 내 인사권을 금감원장이 행사하고 있다. 금융 당국의 관계자는 “금감원 내 감독·검사 기능과 소비자 보호 기능을 화학적으로 결합하는 쇄신안이 이뤄질 것”이라며 “소비자 보호를 금감원의 정체성으로 설정하기 위한 대대적인 조직 개혁이 골자인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금감원의 공공기관 지정은 남은 변수다. 공공기관 지정은 정부조직법 등에 근거하지 않고 공공기관운영위원회의 결정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아직 논의가 중단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금감원은 공공기관으로 지정될 경우 금융위 통제에 더해 재경부 평가까지 더해지면 독립성이 크게 약화할 것이라는 주장을 펴왔다. 금감원 비대위 관계자는 “우리가 승리했다고들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금소원 분리 철회가 영구적·확정적인 게 아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업무를 소비자 중심으로 판단하고 바꿔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금융위의 경우 기존 150조 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 조성과 석유화학 산업 구조조정, 코스피 5000 달성, 금융권의 보안 강화 등의 목표 달성을 위해 정책 속도를 더 높일 것으로 보인다. 금융위의 고위 관계자는 “새 정부 출범 이후 업무를 열심히 해왔고 앞으로도 열심히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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