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이 국내 인공지능(AI) 인프라 투자를 전격 발표하면서 막판 3개월간 이뤄진 물밑 협상이 주목받고 있다. ‘1경 7000조 원’의 자금을 굴리는 블랙록은 그동안 국내에서는 약 37조 원 규모의 상장사 주식 투자 이외에는 뚜렷한 투자 행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블랙록과 정부의 투자 양해각서(MOU) 체결에는 블랙록 계열사인 글로벌인프라스트럭처파트너스(GIP)의 김용 부회장과 차지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의사 출신으로 국제 무대에서 의기투합했던 인연이 밑바탕이 됐다.
24일 투자은행(IB) 업계와 차 의원실에 따르면 블랙록과 정부는 재생에너지 기반 하이퍼스케일 AI 데이터센터 설립과 운영을 위한 투자를 위해 범정부 차원의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할 계획이다. AI 주무 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뿐만 아니라 정책 조정과 지원을 위해 기획재정부, 정부 부처 개편으로 등장할 기후환경에너지부도 참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차 의원은 이날 서울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래리 핑크 블랙록 회장이 예상한 것보다 협력 의지가 강했고 이에 따라 굉장히 구체적인 후속 조치를 준비하고 있다”면서 “한국과 블랙록 사이 TF가 구성돼 협의하면 재생에너지 분야에 대한 투자가 가장 먼저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주당에서 AI미래전략특별위원장을 맡고 있는 차 의원은 이재명 정부가 출범한 직후인 6월부터 한국의 AI 산업 성장을 위한 투자 유치를 고민해왔다. 그는 평소 한국의 AI 산업 잠재력을 놓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눠왔던 김 부회장을 찾았다. 처음에는 국내에서 AI 기반에 투자할 투자자와 기업을 찾았지만 훨씬 더 대규모 투자유치를 위해 AI 생태계에 속한 글로벌 기업을 투자에 합류시키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차 의원은 국경없는의사회, 김 부회장은 세계보건기구(WHO)에서 활동하면서 오랫동안 교류해왔다.
2019년까지 세계은행(WB) 전 총재였던 김 부회장은 2019년 GIP에 합류해 신흥국 인프라 투자의 중요성을 설파해왔다. 그는 WB 재직 시절 신흥국 정부가 자본이 부족해 사회 기반 시설을 짓지 못할 때 사모투자자를 통해 자금을 끌어온 경험을 갖고 민간투자사에 뛰어들었다. GIP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중남미 지역 신흥국을 중심으로 정부 주도의 인프라 사업에 투자해온 전문 운용사다. 올해 초 블랙록이 인프라 투자를 강화하기 위해 GIP를 인수하면서 김 부회장도 블랙록의 일원이 됐다. 핑크 회장이 22일(현지 시간) 이재명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인의 입장에서, 한국인이 가진 전략이나 사고에 맞춰서 한국이 AI와 재생에너지 전환의 주요국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게 블랙록의 일”이라고 발언한 점도 김 부회장 등의 역할이 영향을 끼쳤다는 해석이 나온다.
김 부회장은 7월 한국투자공사 초청으로 방한해 한 강연에서 “한국의 AI 기반 의료 영상 의학은 세계 최고 수준이고 AI 기반의 인프라에 기회가 있을 것”이라며 “아시아를 비롯한 신흥시장은 민간 자본을 필요로 하고 인프라 투자를 위해 국가 성장을 이루는 동시에 수익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핑크 회장 역시 인프라 투자가 사모신용과 함께 앞으로 블랙록을 이끌어갈 두 축이라고 강조해왔다. 그는 연례 서한에서 “정부는 적자를 감수하고 인프라에 자금을 지원할 수 없고 대신 민간 투자자들에게 의존할 것”이라며 “단일 AI 데이터센터 건설 비용은 400억 달러(약 55조 9000억 원)에서 500억 달러(69조 9000억 원)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블랙록은 자신들이 구축한 인공지능인프라파트너십(AIP)을 활용해 국내에 투자할 것으로 보인다. AIP에는 엔비디아, xAI, 마이크로소프트, 아부다비의 AI 기술투자사 MGX 등이 참여하고 있으며 이들과 기관투자가의 출자금은 GIP를 통해 인프라 사업에 투자된다.
관건은 높은 수익률을 목표로 하는 블랙록의 투자가 국내 AI 산업과 어떤 상호이익이 되느냐다. 우리 정부는 블랙록과 사전 논의 과정에서 이번 사업에 국내 AI 관련 기업이 참여하고 재생에너지를 최대한 활용할 것, 인프라 시설은 지역 균형 발전 전략에 따라 이뤄질 것을 제안한 것으로 파악됐다. 블랙록의 구상이 특정 기업을 위한 AI 데이터센터가 아닌 국내외 다양한 기업이 공유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AI 데이터 센터를 독점적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국내 대기업과 조율도 필요하다. 글로벌 IB 관계자는 “블랙록 외에도 해외 많은 인프라 펀드가 SK·LG·KT·롯데 등을 찾아 데이터센터를 매각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면서 “우리 기업들은 원하지 않는 방식”이라고 전했다.
블랙록의 국내 사업 확대 여부도 관심을 모은다. 블랙록은 2008년 일반자산운용사로 등록해 개인을 위한 공모펀드 판매에 나섰다가 2021년 공모펀드 사업을 매각했고, 한국 법인 유상감자도 실시했다. 그러나 지난해 말 국민연금 해외대체실장과 운용전략실장을 지내고 맥쿼리자산운용과 모건스탠리 투자운용사업부문을 거친 이윤표 대표를 선임했다. 업계 관계자는 “앞으로는 기관투자가를 대상으로 한 인프라성 투자를 확대하겠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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