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가 미국의 3500억 달러(약 485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 요구에 맞서 미 측에 무제한 통화스와프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7월 말 한미 관세 협상 타결 당시와 달리 입장을 바꿔 펀드 내 현금직접출자 비중을 대폭 늘릴 것을 요구하자 외환시장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안전망으로 통화스와프 개설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14일 “대미 투자 펀드 실행과 관련해 한미 양국이 다양한 방안을 놓고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통화스와프 카드를 꺼낸 것은 대미 투자펀드 조성에 외환보유액을 직접 투입할 경우 외환시장 불안과 외환 위기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8월 말 기준 한국 외환보유액은 4163억 달러(약 580조 원)로 세계 10위 수준이다. 하지만 이 규모만으로는 미국이 요구한 투자금을 안정적으로 조달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앞서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9일 방송기자클럽 초청토론회에서 “우리나라가 (외환시장에서) 1년에 조달할 수 있는 (달러) 금액이 200억~300억 달러를 넘기 어려운 반면 일본은 기축통화국인 데다 미국과 무제한 통화스와프도 체결했다”며 “한미 간 (달러 조달 관련) 구조를 어떻게 짤지, 근본적으로 외환시장에 미칠 충격에 대해 미국이 같이 고민해주고 해답을 달라고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시장에서는 통화스와프 협정 없이 현금 직접 투자 비중을 높일 경우 거액의 달러가 빠져나가게 돼 원·달러 환율이 수백 원 이상 치솟을 수 있다고 내다보고 있다.
반면 통화스와프를 체결하면 원화를 발행해 달러로 전환한 후 펀드를 조성할 수 있고 외환보유액을 쓰더라도 원·달러 통화스와프를 통해 외환 부족 사태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다. 일본도 미국과 무역 합의를 신속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도 통화스와프가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다만 미국이 우리 측의 통화스와프 개설 요구를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미국은 통화스와프를 맺을 때 엄격한 조건을 요구한다. 기축통화국이거나 외환시장이 24시간 개방된 국가와만 맺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외 국가들에 대해서는 금융위기 등 비상시국에서만 예외적으로 허용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2020년 코로나 위기 당시 우리나라와 맺은 통화스와프가 대표적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우리 측의 이 같은 요구가 대미 투자 펀드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한 전략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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