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블코인 발행 라이선스 도입을 한 달 앞둔 홍콩 현지에선 막바지 준비 작업이 숨 가쁘게 이어지고 있었다. 현재까지 라이선스 신청 계획을 공식화한 곳만 최소 9곳. 블록체인 전문 기업은 물론 알리페이 운영사 앤트그룹 같은 대형 핀테크에 스탠다드차타드 등 전통 금융사까지 가세하면서 초기 시장 주도권을 둘러싼 치열한 각축전이 진행 중이다. 홍콩 당국이 초기에는 소수의 발행자에만 라이선스를 부여하겠다고 못 박은 만큼 경쟁의 열기는 더욱 뜨겁다.
라이선스 제도는 올해 5월 홍콩 입법회를 통과한 첫 번째 스테이블코인 조례를 통해 도입됐다. 조례는 홍콩 내에서 법정화폐를 발행하는 경우 홍콩금융관리국(HKMA) 등록을 의무화하고 발행량 이상 준비금을 보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시행일은 오는 8월 1일로 입법 후 불과 3개월 만에 본격 시행에 돌입하는 이례적인 초고속 제도화다.
이 같은 속도감의 배경엔 HKMA가 지난해부터 운영해 온 스테이블코인 발행자 규제 샌드박스가 있다. HKMA는 샌드박스 참여사로 △스탠다드차타드·홍콩텔레콤·애니모카브랜즈의 합작법인 △B2B 결제 전문 RD테크놀로지 △중국 징둥닷컴의 스테이블코인 자회사 징둥코인링크 등 3곳을 선정해 다양한 사용 사례를 시험하도록 했다. 1년 가까이 업계와 직접 소통하며 스테이블코인 사업모델을 이해하고 규제 기대치를 사전에 조율한 것이다. 2017년부터 오랜 기간 중앙은행디지털화폐(CBDC)를 연구해 온 홍콩이지만 최근 스테이블코인의 확산에 대응해 두 가지 디지털 화폐의 공존 전략으로 발빠르게 선회했다는 평가다.
HKMA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홍콩에는 전통적인 은행 예금, 선불식 결제 수단(SVF) 등 다양한 교환 수단이 존재하고 스테이블코인은 이 가운데 새로운 결제 옵션으로 자리하게 될 것이라고 본다"며 “스테이블코인 발행자 규제와 CBDC 프로젝트를 통해 공공·민간 디지털 화폐가 공존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홍콩의 미래 디지털 경제에 기여하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스테이블코인 규제에 대한 유연한 접근은 외화 연동 발행을 허용한 조례 설계에서도 확인된다. 조례에 따르면 홍콩 스테이블코인 발행 라이선스를 취득한 기업은 자국 통화(HKD)뿐 아니라 달러(USD), 유로(EUR) 등 외화에 연동된 스테이블코인도 발행할 수 있다. 이재호 K&L 게이츠 홍콩사무소 변호사는 “이론적으로는 원화 연동 스테이블코인도 오히려 한국보다 먼저 홍콩에서 발행될 수 있는 구조”라며 “테더(USDT)가 초기에 빠르게 출시돼 시장점유율 60% 이상을 확보한 것처럼 스테이블코인은 선두주자가 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홍콩이 샌드박스를 통해 현실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제도를 재빨리 설계한 것도 이 같은 속도전을 의식한 것”라고 설명했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준비하는 홍콩 기업들에게 이제 관건은 스테이블코인 실사용처 확보다. HKMA는 라이선스 발급 조건으로 준비금 관리나 상환 능력 등과 함께 실질적인 사용 사례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이 실제 경제적 고충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사업 계획이 실행 가능하고 규제 요건에 부합하는지도 함께 평가할 것이라는 게 당국의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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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에서 만난 샌드박스 참여 기업들 역시 실사용 기반 마련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이미 규제당국과 수차례 소통을 거치며 피드백을 주고받은 만큼 제도 시행 즉시 라이선스 신청이 가능하다는 분위기지만 워낙 쟁쟁한 경쟁자들이 많은 만큼 실사용 검증과 파트너십 확보 등 철저한 준비에 집중하고 있다.
RD테크놀로지는 자체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한 국경 간 송금, 디지털 자산 거래, 실물연계자산(RWA) 결제 등 다양한 시나리오를 실험했다. 홍콩 GF증권과의 협업을 통해 토큰화 채권의 결제 수단으로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했고 해시키 거래소와는 향후 상장 협업 기반도 구축했다. 리타 리우 RD테크놀로지 대표는 “무역업자와 수출입 기업 등과도 스테이블코인을 통한 송금과 결제에 대해 실질적인 논의를 하고 있다”며 “특히 기존 결제 인프라가 취약한 신흥시장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이 훨씬 효율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RD테크놀로지는 B2B 결제에 특화된 플랫폼 사업을 운영하는 만큼 2020년 설립 당시부터 스테이블코인 혁신을 핵심 목표로 삼아왔다”며 “다수의 가맹점과 기관 고객을 보유하고 있어 이들과 연계한 스테이블코인 활용이 자연스럽다. 홍콩에서 신흥시장으로 송금하는 데 며칠씩 걸리는 현실을 고려할 때 스테이블코인은 비용과 시간을 동시에 줄일 수 있는 효율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라이선스 획득 이후에는 스테이블코인의 실사용 사례를 확장하기 위한 생태계 구축에 주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단순히 법안이 마련되고 발행 라이선스를 받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스테이블코인은 하나의 생태계이며 국경 간 결제 등 더 많은 실사례들을 생태계 안으로 끌어오는 작업이 필요하다”며 “이는 은행과 기존 결제사, 전통 상인 등 다양한 참여자들의 협력이 필요한 일이며 우리는 인프라 구축자로서 더 많은 전통적인 거래 흐름을 블록체인 세계로 유입시키려고 한다"고 말했다.
블록체인 게임·NFT 분야에서 활동해온 애니모카브랜즈는 스탠다드차타드, 홍콩텔레콤과 구성한 합작법인을 통해 샌드박스에 참여했다. 세 기업은 각각 △금융 인프라 및 규제 대응(SCBHK) △소비자 결제 네트워크(HKT) △블록체인 생태계 설계(애니모카) 각자의 장점을 살려 역할을 나누며 초기부터 강력한 실사용 기반을 확보하고 있다.
에반 아우양 애니모카브랜즈 그룹 사장은 “샌드박스 내에서 3사가 기술적, 운영적 과제를 함께 해결해왔다"며 “자사 블록체인 게임 내 자산을 홍콩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으로 직접 구매할 수 있는 구조는 물론 향후 증권과 채권 등 전통 자산 토큰화 거래 활용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앤트그룹과 같은 빅테크의 시장 진출에 대해서도 업계는 ‘긍정적 자극’이라는 반응이다. 리우 대표는 “전통 기업들이 스테이블코인 발행에 뛰어든다는 것은 시장에 수요가 있다는 방증이며 동시에 이용자 인식 확산에 도움이 된다”고 평가했다. 아우양 사장 역시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채택”이라며 “다양한 발행인이 생태계에 참여하고 각자의 사용 사례를 개발하는 건 환영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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