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발 관세 압박에 1분기 역성장까지 동시다발 악재로 한국 경제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수렁에 빠졌다. 경제 수장 공백까지 덮친 가운데 이제 믿을 구석은 한국은행뿐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화려한 이력과 탄탄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자랑하는 이창용 총재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기대가 더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은 안팎의 시각은 다소 다른 듯했다. 전직 한은 고위 관계자는 “과거 총재들이 말을 아낀 건 바보라서가 아니다. 말의 무게를 알았기 때문”이라고 일갈했다.
모호함을 유지한 역대 총재와 달리 이 총재는 직설 화법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 총재가 지난달 30일 정책 심포지엄에서 “한국도 선진국처럼 정책금리가 제로(0) 하한 수준에 근접하게 되면 QE 정책을 도입할 수 있을지 등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언급하자 예상치 못한 파장이 일었다.
이 발언 이후 시장에서는 최종 금리가 낮아질 수 있다는 해석이 확산됐고 당일 국고채 금리는 연중 최저치로 떨어졌다. 한 채권 전문가는 “해외 투자은행(IB)에서 총재 발언의 진위를 따지는 전화가 빗발쳤다”고 토로했다.
시장의 반응은 단기로 끝났지만 사안의 무게가 가볍지는 않다. 이 총재의 발언은 각종 투자 커뮤니티에 박제되며 ‘새 정부의 부동산 정책과 QE가 맞물리면 집값은 오른다’는 기대로 이어졌다.
이미 한 차례 해명에 나섰던 한은은 12일 공식 블로그를 통해 QE 검토에 재차 선을 그었다. 한은 내부에서는 정책 홍보의 장이 이슈 블랙홀이 된 점을 두고 불편한 기색도 읽힌다.
사실 이 총재도 QE에 방점을 찍은 건 아닐 터다. 대신 잠재성장률이 크게 떨어질 경우를 대비해 다양한 정책의 수를 고민해야 한다는 취지로 보는 게 더 타당할 듯하다. 이 총재 역시 “중장기적 고민에 대한 얘기였다”면서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발언의 취지가 곧바로 시장에 온전히 전달되는 세상은 아니다. 수신자의 ‘오독’이 반복되면 한은의 정책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특히 기대가 한 방향으로 쏠릴 경우 그것이 금리 인하든 집값 상승이든 간에 통화정책은 더욱 어려워진다.
이 총재는 그간 다양한 개혁 의지를 통해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꾸준히 목소리를 내왔다. 그러나 발언 하나하나가 왜곡되거나 오용되면서 ‘말빚’만 쌓이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총재의 의도 못지않게, 그 발언이 시장에 어떻게 읽히는지까지 고려하는 것이 통화정책의 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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