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한 해 동안 대·중견기업의 벤처투자가 전년에 비해 눈에 띄게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고금리 기조가 장기화되고, 고환율 등 각종 대외 리스크가 잇따라 터지며 보수적인 기조를 유지해온 결과로 해석된다. 다만 일부 대기업 위주로 투자 명맥은 유지돼 최소한의 성장 불씨는 살려놨다는 의견도 나온다.
2일 서울경제가 벤처투자 플랫폼 더브이씨와 함께 대기업과 중견기업의 2024년 투자 현황을 분석한 결과 이들은 총 120건의 스타트업 투자를 진행했다. 전년의 218건에 비해 절반 가까이 줄어든 것이다. 다만 금액 기준으로는 6680억 원을 기록한 2023년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2024년 12월, 한 해 마감을 앞두고 삼성전자가 로봇 전문기업인 레인보우로보틱스에 2675억 원 규모의 대형 투자를 한 덕분이다. 기업형 벤처캐피털(CVC) 투자는 2023년 1조1676억 원에서 2024년 9996억 원으로 줄었다.
업계에서는 경기 침체 경고등이 켜지고, 고금리 기조가 유지되면서 예년에 비해 스타트업 투자에 대한 관심이 눈에 띄게 줄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CVC를 통하지 않고 직접 지분 투자에 나서는 것은 향후 사업 시너지 효과 등을 염두했기 때문인데, 현재는 장기 투자가 아닌 생존을 걱정해야 할 시기라는 위기감이 그만큼 팽배하다는 것이다.
신사업 진출을 주저하는 기업이 늘면서 M&A 시장에도 찬바람이 불었다. 2024년 스타트업 인수합병(M&A) 시장은 2022년에 비해 10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든 것으로 나타났다. 스타트업 M&A는 2022년 81건(2조 2894억원)에서 2023년 39건(4501억 원)으로 급감했고, 2024년에는 32건(2231억 원)으로 더 줄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수천억원 규모의 빅딜이 즐비했지만 지난 해 100억 원을 넘은 M&A 사례는 5건에 불과했다.
다만 일부 대기업들은 미래 성장 동력 확보 차원에서 최소한의 투자는 집행했다. 대기업 중 가장 투자를 많이 한 곳은 LG전자로 인공지능(AI) 최적화 솔루션, 재활용 플라스틱 소재 플랫폼 등 6개 기업에 시드 투자를, 홈 IoT 브랜드 업체에 시리즈 B 투자를 집행했다. 당장은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워도 성장 동력 확보 노력은 지속하겠다는 기조로 해석된다. 중견기업에서는 인포뱅크, 웹젠, 브이엔티지 등이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벤처투자 업계에서는 대·중견기업이 새해에도 보수적인 투자 기조를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직접 투자보다는 유한책임투자자(LP)로 참여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기업이 늘어날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2024년 8월 SBVA(구 소프트뱅크벤처스)가 신규 결성한 1억3000만 달러 규모의 ‘알파 인텔리전스 펀드’에 LG전자, 한화생명, SK네트웍스 등이 참여한 것이 대표적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한동안 주요 기업들이 스타트업과 오픈 이노베이션을 하는 것이 유행이었지만, 대부분 기술실증(PoC) 단계에서 머물고 최종 지분 투자까지 어이지는 사례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면서 “혹한기가 장기화하면서 일찌감치 벤처투자를 주도했던 건설사 등의 포트폴리오사에서 폐업 사례가 속출하고 있는 것도 투자를 더욱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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