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정여울의 언어정담] 내 안의 '내면아이'를 토닥이는 언어

작가

어두운 상처·밝은 빛 함께 지닌 자아

방치하면 트라우마는 더욱 심화

꾸밈없는 미소가 최고 상처치유제

웃을 때 삶의 정수 온몸으로 호흡

정여울 작가




어떤 단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단어가 유난히 마음을 할퀴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예컨대 ‘취급주의’라는 뜻을 지닌 ‘프래질(fragile)’이라는 단어가 그렇다. 망가지기 쉽고, 무너지기 쉽고, 허약한 내 자아의 어떤 부분을 건드리는 단어인 것이다. 프래질이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화들짝 놀라기도 하고 어쩐지 반가운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아니, 이거 내 영혼의 그림자를 꼭 닮은 단어가 아닌가’ 싶어 허를 찔린 기분이 드는 것이다. 지금도 공항에서 ‘취급주의(fragile)’라는 스티커가 붙은 수하물을 볼 때마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곤 한다. 저 안에 어떤 깨지기 쉽고, 망가지기 쉬운 존재가 들어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 부디 우리가 살면서 상대방의 연약한 부분을 조심조심 다독이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며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바로 이럴 때 내 안에서 눈을 뜨는 자아가 ‘내면아이’다. 심리학에서 내면아이는 성인자아의 위로와 조언을 필요로 하는 ‘자기 안의 그림자’이자 ‘자기 안의 숨겨진 햇빛’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내면아이는 ‘우리 안의 가장 어두운 상처를 안고 있는 존재’면서 동시에 ‘우리 안의 가장 빛나는 가능성을 품은 존재’이기도 하다. 내면아이는 생이 끝날 때까지 계속 성장해 더 나은 성인자아와 합체될 수도 있고, 노인이 돼서도 여전히 그 사람의 발목을 잡으며 ‘절대로 자라지 않는 유치한 부분’으로 남아 있을 수도 있다. ‘아직도 막내티를 못 벗었네’ ‘아직도 무슨 문제에만 부딪치면 도망치기 바쁘네’라는 잔소리를 듣는 우리 안의 내면아이를 성장시키는 힘은 바로 끈질긴 현실감각과 책임감, 그리고 더 성숙한 자신이 되기 위한 매일의 노력이다. 우리 안의 상처 입은 내면아이를 성장시키려면 성인 자아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제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성인자아, 상처 입어도 언젠가는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설 수 있는 성인자아가 먼저 말을 걸어주어야 한다. 아직 상처 받아 마음 깊은 곳의 골방에서 울고 있는 내면아이에게 성인자아가 다정하게 말을 걸어줄 때, 내면아이는 성장과 치유의 동력을 얻을 수 있다.

나는 내면아이에게 가끔 말을 걸어 안부를 확인하곤 한다. “얘야, 오늘은 기분이 어때? 며칠 전 그 상처는 조금 회복이 된 거니.” 내면아이는 어떤 날엔 환하게 미소짓고, 어떤 날엔 슬픈 표정으로 볼멘소리를 한다. 아직 마음의 상처가 다 낫지 않았다고. 그럴 때 나의 성인자아는 상처의 ‘의미’를 이야기해준다. 그 상처를 대면하고 극복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고 지혜로운 존재라고. 내면아이를 다독이면 내 안의 순수성과 잠재력이 눈부시게 성장하지만, 내면아이를 방치하면 트라우마는 더 심화된다. 우리는 자기 안의 내면아이를 꼭 안아주고 햇빛 가득한 세상 속으로 데려와야 한다. 해원(解寃)을 끝내지 못한 응어리가 가슴에 켜켜이 쌓여 우리 영혼의 중심부에서 화약고처럼 폭발해버리기 전에.



트라우마의 역설은 그것이 ‘삶을 파괴하는 힘’을 가진 동시에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힘’ 또한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내 안의 상처를 꺼내 들여다보고 그것을 말이나 글로 표현할 때마다 그 상처가 점점 ‘무섭지 않은 존재’로, ‘마침내 내가 보듬어야 할 존재’로 바뀌어가는 것을 느낀다. 트라우마를 애써 숨기는 ‘방어의 에너지’를 트라우마를 꺼내 어루만지는 ‘치유의 에너지’로 바꿀 때, 우리 안의 잠재력은 성장할 수 있다. 매일매일 트라우마와 대면하는 연습을 하면 무시무시한 괴물 같은 트라우마가 어느 순간 견딜만한 것으로 변해가고 마침내 내가 보듬어야 할 존재, 끝내 껴안아야 할 나 자신의 일부임을 깨닫게 된다. 나는 나를 웃게 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내 안의 ‘밝고 환한 내면아이’가 미소짓는 것을 느낀다. 나의 내면아이가 손뼉을 치며 기뻐하는 것을 느낀다. 꾸밈없이 환한 미소야말로 최고의 언어임을, 미소야말로 최고의 상처 치유제라는 것을 깨닫는다. 내가 까르르 웃을 때마다, 오늘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오늘도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 오늘도 삶의 정수를 온몸으로 호흡할 수 있다는 것을 마냥 기뻐하는 내 안의 내면아이도 활짝 웃는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울경제 1q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