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직장인들이 매일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6시에 퇴근한다. 그런데 당연한 듯 보이는 이 시간표가 140년 전 고작 25개국 대표가 결정한 제국주의의 산물이라면 어떨까. 1884년 미국 워싱턴에서 설정된 표준 시간대는 전 세계를 서구 중심의 시간 체계로 동기화시켰고 오늘날 우리의 생활 패턴까지 획일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런 시간 체계가 개인이 가진 고유한 삶의 리듬을 억압하고 있다면 이제는 판을 뒤집을 때가 아닐까.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 M2에서 28일까지 열리는 ‘타임 존 프로토콜’은 이런 표준화된 시간 체계를 해체하기 위해 마련된 예술적 실천의 장이다. 글로벌 브랜드 샤넬과 리움이 협업하는 중장기 연구 프로그램 ‘아이디어 뮤지엄’의 세 번째 프로젝트인 이 전시는 미국의 듀오 아티스트 ‘블랙퀀텀 퓨처리즘(BQF)’이 기획했다. 뮤지션이자 시인·교수인 카메이 아예와와 변호사·작가·주거권 활동가인 라시다 필립스로 구성된 BQF는 지난 10여 년간 퍼포먼스, 설치, 음악, 글쓰기 등 다양한 예술 형식을 통해 기존 시간 질서를 뒤집고 풀어헤쳐 왔다. 최근 서울경제신문과 만난 이들은 “누구에게나 시간은 24시간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시간이 중립적이지도, 평등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리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BQF는 세계 표준으로 고정된 하나의 시간 대신 “과거·현재·미래가 함께 연결된 그물 같은 시간” 개념을 제안하며 다양한 시간성이 공존하는 미래를 꿈꾼다. 작업 방식은 ‘따로, 또 같이’로 요약된다. BQF는 “우리는 많은 관심사를 공유하기에 대부분 프로젝트는 대화에서 시작한다”며 “한 명이 특정 주제를 깊이 읽거나 생각하다가 서로 대화를 나눈 뒤 사운드, 글, 시각예술, 퍼포먼스 등을 통해 더 탐구하기로 결정하는 식”이라고 설명했다. 일례로 BQF의 첫 프로젝트는 2014년 라시다가 시간 여행에 관한 사변 소설을 쓰고 카메이가 사운드를 입힌 작업이었다. BQF는 “우리 프로젝트는 표준화된 시간을 흔드는 동시에 새로운 시간성을 경험하고 상상하게 이끈다”고 말했다.
‘타임 존 프로토콜’ 역시 이런 프로젝트의 연장선이다. 한국 관객들에게는 BQF의 예술 실험을 처음 경험할 기회다. 2022년 미국 뉴욕에서 첫 공개된 전시를 한국적 맥락으로 재현한 이번 전시는 1884년 국제 본초자오선 회의를 중심으로 현대의 시간 규칙들이 만들어진 일련의 과정을 추적한다. 또 시간에 대한 인종·사회적 억압의 역사를 새긴 연표, 시간성에 관한 영상과 라이브러리 등을 마련했다. BQF는 “세계 표준 시간이 인위적으로 정해지고 강요되는 과정을 보면서 시간이란 언제든 재구상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짚었다.
BQF와 국내외 전문가가 서울에서 함께 시간 개념을 사유한 ‘본초자오선 언컨퍼런스’도 전시의 중요한 일부다. BQF는 “모든 시간은 날씨나 정치처럼 지역적이라고 믿는다”며 “여러 시간대가 교차하고 충돌하며 겹겹이 쌓인 채 흐르는 서울에서 이곳 관객들이 경험하고 있는 다양한 시공간의 감각을 공유하는 일은 무척 즐거웠다”고 말했다.
BQF는 시간을 새롭게 사유하는 방식을 계속 탐구할 계획이다. 이들은 “억압적이고 지배적인 시간관을 허물고 건강한 시간적 흐름을 회복하고 싶다”며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향하는 단방향의 직선이 아니듯 우리의 작업 역시 끝나는 지점이 없는 순환적이고 창조적인 긴 흐름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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