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 속 그림을 향해 한 발짝 걸음을 옮기자 물의 도시 베니스의 풍경이 실제처럼 살아난다. 그림 속 운하는 관객이 앞으로 한 걸음, 옆으로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함께 일렁이며 시선 끝을 따라 춤춘다.
일반적인 평면 회화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입체감을 선사하며 시각적 쾌감을 자극하는 영국 현대미술가 패트릭 휴즈의 작품이 15년 만의 개인전을 통해 한국을 찾았다. 서울 용산구 소월로 박여숙화랑에서 이달 말까지 열리는 개인전에서는 휴즈의 최신작을 포함해 지난 작업의 주요 흐름을 아우르는 회화 총 23점이 공개된다.
휴즈는 1964년 '역원근법(Reverspective)'로 이름붙인 독창적인 기법을 창시해 회화와 조각,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독특한 작품들을 제작해왔다. 그의 작품은 입체적인 나무 구조물 위에 전통적 원근법을 역방향으로 적용, 가장 멀리 있는 지점을 가장 가까이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그림이 마치 허공으로 튀어나온 듯한 시각적 착시를 일으킨다. 납작하게 보였던 풍경이 어느 순간 눈앞에 떠올라 마치 그 공간에 있는 듯한 경험을 선사하는 작품은 평면 회화에서는 찾기 어려운 높은 몰입감을 선사한다.
보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재미있기에 그의 그림은 7살 어린이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대에 사랑받아 왔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단순히 재미있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눈에 보이는 현실과 인지하는 실존 사이의 괴리가 큰 휴즈의 그림들은 관람객에게 방향 감각을 잃게하고 새로운 진실을 찾게 하는 일종의 장치다. 휴즈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은 관객에게 ‘모순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라며 “불일치가 발생하면 우리는 새로운 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또 그의 그림은 관객이 직접 몸을 움직여 적절한 시점을 찾는 노력을 통해 비로소 완벽해 진다는 특징이 있다. 휴즈 역시 “움직임은 생명의 조건”이라며 “내 작품은 관람자의 시선과 발걸음 속에서 끊임없이 춤추며 살아 움직인다”고 말했다. 기술이 아닌 인식 혁명으로 관객과의 상호 작용을 꾀한, 인터랙티브 예술의 원형인 셈이다.
전시를 기획한 박여숙화랑 측은 “이번 전시가 관람객에게 단순한 감상을 넘어 세계와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는 특별한 체험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3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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