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세의 전직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가 가자 지구 재건 및 통치 계획의 핵심 인물로 급부상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9일(현지시간) 가자지구 전쟁 종식을 위한 평화구상을 내놓고 하마스에 사흘 안에 이를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전멸을 각오하라고 밝혔다. 이날 발표한 계획에는 72시간 내 인질 전원 송환과 하마스 무장 해제, 전후 가자 지구 재건 구상까지 담겼다.
이 계획에는 블레어 전 영국 총리의 이름이 언급돼 눈길을 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밝힌 계획에 따르면 전쟁이 종식되면 가자는 팔레스타인인과 국제 전문가들로 구성된 비정치적인 '팔레스타인 위원회'의 임시 과도 통치하에 운영된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이사장을 맡고 블레어 전 영국 총리 등 다른 국가수반들이 참여하는 '평화이사회'의 감독과 관리를 받는다. 특히 블레어 전 총리가 가자지구 과도 통치 기구의 수장을 맡을 가능성이 높다고 뉴욕타임스(NYT)는 보도했다.
블레어 전 총리가 갑자기 가자 전후 구상의 핵심 인물로 대두된 이유는 그가 사실상 이번 평화 협정 시나리오의 설계자이기 때문이다. 영국 일간 더타임스는 블레어가 몇 달간에 걸쳐 만들어 올해 여름에 트럼프 대통령에게 제출한 가자지구 평화 및 재건 계획이 트럼프의 승인을 받아 공개된 것이라고 전했다.
블레어 전 총리는 재임 시절부터 중동 문제에 깊이 관여해 왔으며 이후로도 컨설팅 회사를 설립해 중동 관련 업무를 맡아왔다. 블레어는 1997년부터 2007년까지 영국 총리를 지내고 물러난 직후 유엔, 미국, 유럽연합(EU), 러시아로 구성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 과정 협의체 '쿼텟'의 특사를 맡아 2015년까지 일했다.
물론 그의 중동 정책에는 명과 암이 있다. 그가 영국 총리로 재임할 때 조지 워커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이라크 침공 결정을 열렬히 지지하고 제2차세계대전 이래 최대 규모의 영국군 해외 파병을 통해 협조한 전력이 있는 데다가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돈독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내에서는 그를 불신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 더타임스는 블레어 전 총리가 쿼텟 특사로 재임하는 동안 '두 국가 해법'에 입각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가 독립국가로 자립할 수 있도록 정치적·경제적 기관들을 만들도록 도와줬어야 하지만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쿼텟 특사 자리에서 물러난 블레어는 2016년에 차린 싱크탱크 겸 정치 컨설팅 기관 '글로벌 변화를 위한 토니 블레어 연구소'를 통해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등의 아랍 지도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특히 블레어는 사우디아라비아 실권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자말 카슈끄지 살해 사건을 지시한 증거가 드러난 후에도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데 대해 '무함마드 왕세자가 사우디아라비아 사회에 긍정적 의미에서 혁명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취지로 변명해왔다. 하지만 블레어는 비난을 감수해가며 유지해 온 이런 관계 덕택에 가자지구 재건을 위한 기관이 설립될 경우 그 책임자로 적합한 인물로 떠올랐다. 가자지구 재건에 필수적인 자금을 대게 될 페르시아만 지역의 부유한 브로커들과 친분이 깊기 때문이다.
그는 트럼프의 사위 재러드 쿠슈너와 친분이 깊어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서 신뢰하는 인사이며, PA와도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영국의 저널리스트이자 블레어 전기 작가인 존 렌툴은 워싱턴포스트(WP)와의 인터뷰에서 "그에게는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이 있다"며 "그의 강점 중 하나는 트럼프나 네타냐후처럼 진보적인 친구들이 싫어하는 사람들과 일하는 것에 대해 매우 무감각하다는 것이다. 그는 누구와도 대화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더타임스는 블레어가 가자지구 과도 통치 기구의 수장을 맡는다고 하더라도 상당한 위험이 있다며, 그가 이 직책을 맡을 경우 예측불허의 언행을 하는 트럼프 대통령과 사실상 한배를 타게 된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올해 2월 가자지구 주민 210만명 모두를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고 미국이 소유하는 휴양지로 재개발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이 계획에는 블레어 연구소도 연루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었다. 결국 이 계획은 폐기된 것으로 보이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이런 식으로 극단적인 입장을 취할 경우 블레어 역시 발목을 잡히게 될 수 있다고 더타임스는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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