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이탈 주민들이 온갖 역경을 딛고 한국으로 넘어와 운 좋게 직장에 들어가더라도 사나흘을 버티기가 어려운 게 현실입니다. 한국 사회 적응을 위해 민간 영역에서의 지원이 절실합니다.”
20년 넘게 북한 이탈 주민 지원 활동을 펼쳐온 유욱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북한 이탈 주민의 날(14일)’을 앞두고 9일 서울 종로구 사무실에서 진행된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북한 이탈 주민들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며 이들에 대한 재교육 지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서울대 공법학과를 졸업하고 제28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사법연수원(19기)을 거쳐 1993년부터 태평양에 몸담고 있는 유 변호사는 법조계에서 북한 전문가로 통한다. 2002년 로펌 내 북한팀을 구성한 후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등 남북 경협과 관련한 법률 자문을 맡아 맹활약했다. 앞서 2001년 태평양공익위원회를 설립하고 2009년 재단법인 ‘동천’ 설립을 주도하는 등 로펌 공익 활동의 개척자로도 평가받는다. 유 변호사가 지난해부터 이사장을 맡고 있는 동천은 북한 이탈 주민뿐 아니라 난민, 아동·청소년, 장애인, 빈곤 취약 계층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법률 지원 등 사회 공헌 활동을 펼치고 있다. 우연한 기회에 교회에서 주선한 모임에 나간 일을 계기로 북한 이탈 주민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유 변호사는 “자원봉사자로 북한 이탈 주민과 처음 만난 게 벌써 24년이나 흘렀다”면서 “당시 남북이 개성공단 설치에 합의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북한 이탈 주민에 대한 관심이 남북 경협 등 북한 문제 전반으로 확장됐다”고 회고했다.
유 변호사의 북한 이탈 주민 지원은 교육과 취업에 방점이 찍혀 있다. 2004년 탈북 청소년을 위한 대안학교인 여명학교를, 2007년에는 북한 이탈 주민 취업지원센터를 세웠다. 지난해 개교 20주년을 맞은 여명학교는 북한 이탈 주민 학교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성장해 사회 진출을 위한 발판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탈북 청소년들이 일반 학교에 입학했다가 학력이나 문화 격차를 극복하지 못하거나 학교를 그만두는 사례가 빈번하다는 사실을 알고 북한 이탈 주민 문제의 핵심이 교육이라는 점을 깨닫게 됐다”고 설명했다.
유 변호사는 우리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북한 이탈 주민들의 실상을 전하며 교육과 취업에 오랜 시간 공을 들인 독일의 통일 사례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공산주의 체제에서 주어진 일에만 수동적으로 임하다 이탈한 주민들이 한국으로 넘어와 노동 강도를 견디지 못해 직장을 그만두는 사례가 빈번하다”며 “독일 통일 이후 동독 주민들이 하루 아침에 실업자로 전락하는 등 오랜 진통을 겪었던 만큼 우리도 통일 이후를 철저하게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탈북민들이 연루된 민형사 사건도 유 변호사가 주목하는 분야다. 그는 동천 내 북한·탈북민 분과위원회를 통해 북한 이탈 주민을 상대로 법률 지원에 나서고 있다. 대표적으로 동천은 2023년 대한변호사협회 북한 이탈 주민 법률지원위원회와 함께 추방 위기에 놓인 북한 이탈 주민이 북한에 있는 어머니와의 친생자 관계를 인정받는 법원의 첫 판결을 이끌어냈다. 해당 북한 이탈 주민은 계모의 학대에 시달리다 법원으로부터 친생자 관계가 아니라는 판결을 받았지만 그 결과 한국 국적을 잃게 될 위기에 처했다. 또 북한에 남은 가족들에게 생활비 등을 송금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기소된 사건과 억울하게 보이스피싱에 연루된 북한 이탈 주민의 무료 변론을 맡고 있다. 유 변호사는 “최근 북한 이탈 주민들의 사회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민형사 사건에 휘말리는 일도 늘고 있다”며 “공적인 영역이라는 생각으로 상근 변호사들과 억울한 사례가 나오지 않도록 적극 대응하고 있다”고 전했다.
유 변호사는 새 정부 출범 이후 남북 경협 재개 기대감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조심스러운 입장을 피력했다. 통일부 남북협력지구 법률자문단 위원장을 맡고 있는 그는 “북미 관계, 북핵 문제와 얽혀 있는 사안인 만큼 당장 남북 경협 재개 시점을 예단하기 어렵다”면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북한 관련 문제를 이념적으로 접근하는 것보다 통일을 대비해 미래 세대를 위한 투자라는 생각으로 남북 경협뿐 아니라 북한 이탈 주민 지원 등 모든 사안을 균형감 있게 다뤘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유 변호사는 인터뷰 말미에 북한 이탈 주민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그는 “북한 이탈 주민을 바라보는 시각은 통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와도 연결이 되는 문제”라며 "북한 이탈 주민들과 잘 어울려 사는 방법을 찾는다면 통일도 잘 준비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들은 통일을 준비하라고 우리가 받은 선물 같은 존재”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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