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은빛 원통형 구조물이 전시장 한켠에서 신비롭게 빛난다. 스스로 빛을 머금은 듯 은은하게 발광하는 얇은 알루미늄 조각은 마치 내부에 자리한 미지의 존재를 감싸는 은빛 베일처럼 기능하며 보이지 않는 ‘낯선 자’의 기운을 감각하게 한다.
한국 1세대 추상 조각을 대표하는 엄태정(87) 작가의 신작 ‘낯선 자의 은신처’ 연작은 서울 원서동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6년 만의 개인전 ‘세계는 세계화한다’의 주제를 가장 잘 드러내는 작품 중 하나다. 20세기 가장 중요한 철학자 중 한 명인 마르틴 하이데거의 명제에서 빌려온 전시명은 존재와 세계의 관계에 관한 고찰을 담고 있다. 하이데거는 예술 작품이 단순히 아름다운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열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강조해왔다. 엄태정의 신작 조각 역시 감추어짐과 드러남 사이의 긴장 속에서 관람자에게 조용히 사유할 수 있는 새로운 명상적 공간을 열어 보인다. 작가는 “하나의 조각이 세워지면 그 안에 내재된 마법 같은 힘이 기존 공간을 새로운 에너지로 가득찬 새 공간으로 바꾸어 낸다”며 “대형 조각이야말로 하이데거의 철학에 가장 부합하는 예술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신작 ‘1000개의 찬란한-막고굴 시대’는 신성과 수행, 역사와 서사가 축적된 장소를 조각으로 구현한 작품이다. 중국 4대 석굴 중 하나인 막고굴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은 천 년에 걸쳐 완성한 석굴의 역사성과 시간, 압도적인 영적 에너지를 구리로 빚어진 여러 개의 육면체를 견고하게 쌓는 방식으로 표현했다. 각 육면체에 뚫린 검은 구멍들은 미지의 세계로 통하는 통로이자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동굴 내부를 은유한다.
전시에서는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대중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작가의 조각도 여럿 공개된다. 엄태정은 지난 60여 년간 수행과 치유라는 동양적 정신을 금속을 매개로 드러내는 일관된 작업을 해왔지만 다루는 금속과 형식은 끝없이 진화해왔다. 초기에는 철을 주로 다뤘고 이후로는 구리와 청동, 2000년 이후로는 알루미늄까지 소재를 확장했다. 두툼하고 경직된 철 조각에서 가볍고 부드러운 알루미늄 조각으로 이어지는 과정 속에서 조형 언어도 여러 차례 변주됐다. ‘사물 망각(1979)’ 등 초기 구리 작업에서 정주하지 않는 유목적 존재를 표현한 구리 조각 ‘객정(2014)’ 연작 등을 통해 작가의 예술적 여정을 짚어볼 수 있을 전망이다.
조각의 기초가 된 완성도 높은 드로잉과 화사한 색채감을 자랑하는 평면 작업 ‘만다라’ 연작도 눈길을 끈다. 만다라 연작은 가로·세로 1cm 크기의 정사각형을 대형 평면 위에 수행하듯 그려 넣으며 완성한 작품으로 작가의 정신적 스승인 루마니아의 조각가 콘스탄틴 브란쿠시의 ‘무한주’를 연상시키는 조형적 요소들이 더해졌다.
작가는 지금껏 5~6년에 한 번씩 개인전을 열며 대형 신작 조각들로 공간 대부분을 채웠지만 이번에는 신작의 비중이 낮은 편이다. 작가는 “노년이 되니 작업실에 놓인 많은 작업물들, 과거의 작업들도 돌아보게 된다”고 말했다. 작가는 그럼에도 여전히 창작욕이 타오른다면서 “더 큰 공간에서 더 거대한 작업을 더 많이 하고 싶다. 작가란 언제나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존재”라고 웃었다. 전시는 8월 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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