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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보라색 우산의 의미

김태영 사회부기자

김태영 사회부기자




장맛비가 채 그치지 않은 지난 28일 아침. 보라색 우산을 든 시민들이 시청 앞 광장으로 모였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폭력 의혹에 대한 국가인권위원회의 직권조사를 촉구하기 위해서다. 유독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시위 참가자 중 드물게 남성이었던 50대 박모씨였다. 그는 “586이 떠나야 할 때를 알고 아름답게 떠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아 참담해서 나왔다”고 말했다.

박 씨의 일갈은 여권 인사를 중심으로 터져 나온 일련의 성폭력 논란만을 겨냥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실제 친여권에서 나온 발언은 참담했다. 박 전 시장을 둘러싼 의혹이 아직 사실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말이다.

“사적 영역의 논란(서울시 구청장들의 성명)” “맑은 분이라 세상 하직한 것(박범계 더불어민주당 의원)” “자신에 대해 가혹하고 엄격했던 그대(조희연 서울시 교육감)” 발언의 밑바탕에는 하나같이 ‘위력에 의한 성폭력 의혹’이 사적이고도 사소하다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진짜 문제는 사람들의 이 같은 인식이다. “성폭력인 줄 몰랐다.” 많은 권력형 성폭력 가해자들이 이렇게 말한다. 성폭력이 별것 아니라는 생각에 조심하지 않으니 자신도 모르게 가해자가 되는 것이다. 어디 이뿐인가. 그들의 우월적 지위는 성폭력 피해자를 비롯한 조직 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라 동료의 피해를 알아도 쉽게 연대할 수 없다. 반대급부로 ‘왜 문제를 만드느냐’ ‘꽃뱀 아니냐’ 같은 2차 가해만 쉬워진다. 성폭력에 대한 권력자의 무지가 특히 위험한 이유다.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당연히 스스로에게 엄격해야 한다.

그럼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위력에 의한 성폭력은 더 이상 사적이지도 사소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1993년 ‘서울대 신 교수 사건’을 계기로 성희롱은 사회적 범죄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1995년에는 형법 제32장이 남성 배우자를 위한 여성의 순결을 전제로 한 ‘정조에 관한 죄’에서 ‘강간과 추행의 죄’로 바뀌었다. 2013년에는 강간의 객체가 여성에서 모든 사람으로 확대됐다. 2018년에는 권력형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 운동’이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시간이 걸릴지언정 세상은 바뀌었고, 바뀌고 있고, 바뀔 것이다. 광장에 모인 보라색 우산의 의미도 마찬가지 아닐까. youngki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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