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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뒤에 가려진 열악한 환경… ‘APEC 노숙’에 경찰 ‘부글부글’ [채민석의 경솔한이야기]

경찰 직장협의회. 대기장소 모습 공개

박스 깔고 영화관 바닥에 누워 새우잠

경찰직장협의회가 공개한 APEC 행사 당시 경찰관들의 대기 장소 모습. 사진제공=경찰직장협의회




경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성황리에 종료됐다. 우리나라는 안보의 ‘게임체인저’로 불리는 핵추진잠수함 건조 추진과 주한미군의 지속적 주둔을 미국과 합의하고, 세계 최대 그래픽처리장치(GPU) 기업인 엔비디아와 인공지능(AI) 산업에서 협력하기로 하는 등 각종 국가 현안에 대한 청사진을 그릴 수 있는 협의를 잇따라 타결하는 성과를 얻었다. 크루즈선 두 대를 동원해 APEC 회원국 경제인들의 잠자리를 해상에 마련하며 ‘숙소 대란’을 해결하고, 각 국가의 식재료를 활용한 다양한 음식을 제공하면서 식중독은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도 호평을 받았다.

특히 각국 정상이 출국하는 날까지 ‘갑호 비상’을 유지하며 요인들에 대한 철통 경호·경비 임무를 수행한 경찰에 대한 찬사의 목소리도 이어졌다. 경찰은 APEC 관련 집회 및 시위 관리를 위해 1만 명이 넘는 경찰관과 장갑차·헬기 등 장비를 동원해 경주 일대를 ‘진공상태’로 만들어 특별한 사건·사고 없이 행사가 진행될 수 있도록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화려한 결과 이면에는 경찰이 마주한 열악한 환경이 숨어 있었다. 제대로 된 숙소도 제공되지 않아 영화관 바닥에서 폐지를 덮고 자거나 편의점 도시락을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서 취식하는 경찰관의 모습은 경찰 내부 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겨줬다.

이달 11일 전국경찰직장협의회는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경찰청 앞에서 ‘경찰을 노숙자로 만든 APEC 행사 사진전’을 열고 APEC 행사 당시 경찰이 겪은 각종 ‘홀대’를 담은 사진을 공개했다.

직협이 공개한 사진에 따르면 경찰관들은 대기장소로 마련된 영화관 바닥에 모포를 깔고 폐지를 이불 삼아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일부 경찰은 의자를 여러개 이어 붙여 그 위에 누워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사전에 숙소를 배정 받았지만 숙소비가 입금이 되지 않아 입실을 하지 못하고 열악한 다른 숙소에서 숙박했다는 내용의 글도 등장했다.

음식과 관련한 불만도 터져나왔다. 한 경찰관은 경찰 내부망에 올린 글을 통해 “경북경찰청에서 마련한 급식소가 근무지와 1.3㎞ 떨어져 있어 식사를 한 번 하러 왔다갔다 하면 40분이 소요된다”며 “근무자들이 한꺼번에 갈 수 없으니 교대로 가야하는데 식당 운영시간은 고작 두 시간이었다. 교대시간에 쫓긴 직원들은 사비로 햄버거 등을 사먹고 근무에 투입됐다”고 주장했다. 식사를 할 장소를 찾지 못해 일어선 채로 식사를 해결하는 경찰관들의 사진도 공개됐다.

경찰직장협의회가 공개한 APEC 행사 당시 경찰관들의 대기 장소 모습. 사진제공=경찰직장협의회




직협은 강도 높게 경찰청을 비판했다. 직협 측은 “경찰청, 경북경찰청, APEC 기획단이 1년간 준비한 세계적 행사에 동원된 경찰관들의 열악한 환경과 복지 상식 이하의 수당지급을 알린다”며 “현장은 고통 속에 있었는데 지휘부는 자축했다. 언론이 문제를 지적하자 그제서야 점검을 말했지만 이미 현장은 ‘K-치안’이라는 이름 아래 희생만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밝혔다.

직협은 △경찰청 지휘부의 비인간적 운영 실태 조사 △현장과 불통으로 일관한 경찰청 지휘부 전면 교체 △현장경찰의 복무·휴식·인권 보장을 위한 제도적 개혁 즉각 추진 등을 요구했다.

경찰청은 즉각 해명에 나섰다. 경찰청 APEC 기획단은 이달 11일 “고생한 현장 근무자들에게 충분한 휴식과 양질의 식사를 제공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라면서도 "정확한 사실관계를 알릴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경찰은 영화관에서 쪽잠을 청하는 경찰관의 사진에 대해서는 "2시간 근무 후 4시간 대기하도록 조성된 대기 공간"이라며 "호텔·리조트 중심의 보문단지 인프라로 인해 모든 경찰관이 대기시간 이용할 수 있는 실내 공간 확보에 한계가 있었다"고 밝혔다.

또한 정돈된 모습의 경북 경산 소재 모텔 사진을 공개하며 "대부분 숙소가 노후한 것은 아니며 현장 점검을 통해 지역 내에서 최대한 양질의 숙소를 확보했다"며 열악한 모습을 담은 사진에 대해서는 “상당수 정상의 입국이 예정보다 빨라지면서 숙소가 부족하지 않도록 급히 추가 확보한 숙소"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경찰관들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APEC에 동원된 한 경찰관은 “경찰은 그저 필요할 때 마구잡이로 사용하고 제대로 된 대우는 해줄 필요 없다는 경찰청과 정부의 인식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며 “현장 경찰이 5성급 호텔과 최고급 식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현장에서 고생하는 며칠 동안 제대로 몸을 누일 수 있는 숙소와 근무를 하며 버틸 수 있는 체력을 위한 기본에만 충실한 식사를 요구하는 것이 그렇게 과한 부탁인가”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정치권에서도 비판이 나온다. 소식을 접한 김민석 국무총리는 경찰청에 현장 실태 파악과 재발 방지책 마련을 지시했다. 송언석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SNS를 통해 “우리 경찰관들을 노예만도 못한 취급한 것 아닌가"라며 “이번 APEC 경찰관 노예 동원 사태의 진상을 명명백백하게 규명해 책임자를 처벌하고, 피해를 입은 경찰관들에게 적절한 보상이 주어져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송 원내대표는 이번 사태에 대한 국정조사의 필요성도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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