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움직이는 국가정보자원관리원에 화재가 발생해 국가 전산망이 먹통된 사태가 일어난 지 나흘이 지났다. 세계 1등 디지털 정부를 외쳤던 한국은 하루아침에 아날로그 정부로 무너졌다. 가족의 죽음에 쓰러진 유족은 화장 시설 예약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동네마다 주민센터는 민원인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2022년 발생한 SK C&C의 판교 데이터센터 화재에 그토록 추상같이 기업을 질타한 정부와 국회는 어디로 간 것일까.
이 와중에 여당은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책임을 은근슬쩍 이전 정부에 떠넘기려는 발언과 접근 태도로 빈축을 샀다. 더불어민주당의 한 의원은 “지금의 예산은 윤석열 정부에서 만들어 놓은 것”이라며 국가 전산망에 이중 운영 체계가 갖춰지지 않은 책임을 전 정부에 미루려 했다. 그러나 이재명 대통령 말처럼 “국가 디지털 인프라는 핵심 안보 자산이자 국민 일상을 지탱하는 혈관”인데 집권 여당은 새 정부가 출범한 지 100일이 넘도록 무엇을 했느냐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그나마 이 대통령이 화재 이틀 만에 국민을 향해 “송구하다”며 취임 후 첫 사과를 빠르게 한 것은 다행이다. 국민은 적어도 대통령이 취임 첫날부터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기본을 잊지 않고 있음에 안도했을 것이다.
그래도 뼈아픈 건 국가정보자원관리원을 산하에 둔 주무부처인 행정안전부가 방대한 정부 조직 개편을 속도전으로 밀어붙이는 여당에 부응하려 국가 전산망 관리에 소홀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대목이다. 최근 한 달 동안 행안부 장차관의 최대 관심사는 정부 조직 개편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지만 금융위원회 폐지와 금융감독원 분리가 여론의 비판 속에 백지화됐듯 섣부른 정부 조직 개편은 지금 이 순간에도 논란이 되고 있다.
민주당은 12·3 불법 계엄이 부른 대통령 탄핵 후 치러진 대선에서 승리하자 민생 안정과 국민 통합이 최우선이라고 부르짖었지만 줄곧 반대로 갔다. 기업들의 전폭적 지원으로 한미 관세 협상이 타결되고 한미 정상회담의 문이 열렸지만 대통령실과 여당은 2차 상법 개정과 노란봉투법을 밀어붙였다. 야당이 모두 반대한 입법이었지만 필리버스터를 무력화하며 단독으로 처리했다. 이후 정부조직법 개정안과 후속 조치인 국회법 개정까지 독주의 연속이었다.
행정·입법 권력을 틀어쥔 여권이 아집에 빠져 폭주하는 사이 야당은 장외로 뛰쳐나갔고 미국과의 관세 협상 세부 내용은 확정되지 못해 기업들이 미국의 관세 폭탄을 맞고 있다. 안팎으로 불안정의 연속인데 국가 전산망마저 꺼져 국민을 불편하게 하고,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건설 업계의 잇따른 안전 사고나 SK텔레콤·롯데카드의 해킹 사태에 철퇴를 휘둘렀던 여당과 정부가 심각한 국정 불안 상황에 통렬한 반성이 없다면 추석 민심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될 것이 뻔하다.
바뀐 정부조직법이 시행되면서 에너지 정책이 환경부로 이관돼 초유의 정책 실험이 10월 1일부터 시작된다. 내년 1월 2일부터는 기획재정부가 재정경제부와 기획예산처로 분리·출범하는데 벌써부터 경제 컨트롤타워가 제 역할을 할지 의문이 제기된다. 설립 78년 만에 검찰청은 내년 10월이면 문을 닫아 당장 범죄 수사가 제대로 이뤄질지도 불안하다. 추석이 지나면 미중 갈등과 글로벌 무역 질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경주에서 열리는데 별 탈은 없을지 걱정이다.
정부와 여당이 국민 경제에 불확실성을 가중시켜 놓은 채 고꾸라진 경기가 회복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잡으려는 격이다. 세계 최대 수출 시장에서 일본이나 유럽의 경쟁 업체보다 10%포인트 이상 관세를 더 부담하게 된 기업들은 2차 상법 개정이 연말에 몰고 올 태풍과 내년 3월 노란봉투법 시행과 맞물려 벌어질 춘투에 잔뜩 움츠러들어 있다.
국가정보자원관리원이 한 차례 화재로 멈춰서 대혼란이 발생한 것은 평범하지만 안정적으로 나라를 운영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지 일깨운다. 개혁을 명분 삼아 독주를 일삼는 정치를 여권이 멈추지 않으면 이번 아날로그 정부 사태가 끝이 아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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