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내년도 예산안 제출 시한이 다가오는 가운데 야당 사회당이 지지 조건으로 부유세를 요구하면서 세바스티앵 르코르뉘 총리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부유세가 투자자 이탈을 부추길 위험이 있지만 제안을 뿌리치면 불신임 수순을 밟을 수 있다.
17일(현지 시간) 로이터통신은 프랑스 야당인 사회당이 정부가 부유세를 받아들이면 예산안에 동의하겠다는 입장을 펴면서 총리의 운명은 억만장자들에게 어떻게 과세할지에 달려 있다고 보도했다.
이달 10일부터 중도·우파 연립 내각을 이끌고 있는 르코르뉘 총리는 다음 달 7일까지 내년도 예산안을 제출해야 한다. 긴축 문제로 야당과 대립하면서 불과 2년 만에 총리가 네 차례나 바뀌었지만 국가 신용도가 사상 최저로 추락하면서 내년 긴축예산 편성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국제신용평가사 피치는 2일 국가신용등급을 ‘AA-’에서 ‘A+’로 한 단계 하향 조정했다. 재정적자가 지난해 기준 국내총생산(GDP)의 5.8%로 유로존 평균(약 3.1%)을 크게 웃돌고 국가부채는 GDP의 113%를 넘은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당이 내년도 예산안에 동의하는 조건으로 부유세 부과를 내건 셈이다.
프랑스 경제학자 가브리엘 쥐크만이 주장해 ‘쥐크만세’로 불리는 이 세금은 1억 유로(약 1636억 원) 이상의 부를 축적한 상위 0.1% 부자에게 2%의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다. 대상이 1800가구에 불과하지만 세수는 매년 200억 유로까지 확보할 수 있어 재정적자 감축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다. 사회당이 여론조사 기관 Ifop에 의뢰해 조사한 결과 86%가 부유세에 찬성했고 여기에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을 뽑은 유권자 92%가 포함될 만큼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 취임 후 부자 감세, 법인세 인하 기조를 유지해왔던 정부 입장에서 부자 증세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마크롱 대통령은 2018년 130만 유로가 넘는 자산가에게 부과하던 부유세를 부동산자산세로 대폭 축소했다. 부유세 반대론자들은 부유세가 인공지능(AI) 기업인 미스트랄AI 등 미국 오픈AI 대항마의 혁신을 위축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사회당의 요구를 거부하면 정치 리스크는 커질 수밖에 없다. 극우·좌파 연합에 밀린 여소야대 국면에서 상대적으로 온건 좌파인 사회당의 표마저 얻지 못하면 불신임이 불가피하다. 로이터는 “르코르뉘의 정치적 생존은 대중의 지지를 받지만 우파 동맹이 꺼리는 조치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달려 있다”고 지적했다.
이날 프랑스 전역에서는 정부의 긴축재정에 항의하는 대규모 파업과 시위가 열렸다. 10일 ‘국가 마비’ 시민운동에 이은 2차 대정부 투쟁이다. 정보 당국은 참여 인원이 약 80만 명 이상인 것으로 추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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