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맞는 말이지만, 100% 맞는 말은 아니다. 인간은 철저히 유전자의 지배를 받지만 환경적 요인에 따라 형질은 제각기 다르게 발현된다. 유전적 영향력이 매우 높다고 알려진 키조차 유전 요인의 기여도는 약 80%에 그친다. 반면 개인의 성향이 더 큰 영향을 줄 것 같은 우울증은 유전력이 30~50%나 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정치 성향은 어떨까. 타고나는 것일까, 아니면 환경에 의해 형성되는 것일까. ‘보수 본능’은 이 질문에 유전학과 뇌과학의 관점에서 접근하려는 시도다. 저자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최종균 교수로 인간유전체학을 연구하며 유전학, 뇌과학, 진화심리학 등을 바탕으로 인간 본성과 사회 현상을 꾸준히 고찰해왔다. 전작 ‘유전자 지배 사회’에서는 의학뿐 아니라 가정, 경제, 정치, 종교를 아우르는 인간 사회 전반을 유전적 관점에서 분석했다.
이번 책에서 저자는 최근 전 세계적 화두가 된 ‘보수성’의 생물학적 기원을 규명하기 위해 방대한 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분석을 이어간다. 생존을 위해 위험한 대상을 재빨리 인식하고 대응하는 능력, 나아가 안전한 대상을 위험하다고 착각해 과잉 대응하는 성향은 인간 진화에 유리한 전략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보수’란 인간의 진화적 본성, 태도, 신념이자 사회 속에서 발현된 행동 양식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호모 컨서버티버스’, 즉 보수적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생존 전략이 진화 과정에서 불확실한 대상에 대한 두려움을 ‘혐오’로 변형시켰다는 데 있다.
저자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대표적 실험을 소개했다. 실험 참가자들에게 ‘기쁨’ ‘평화’ ‘분쟁’ ‘악마’ 등의 단어가 적힌 카드를 무작위로 건네고 긍정 단어는 왼쪽, 부정 단어는 오른쪽에 배치하게 했다. 그리고 나서 흑인의 얼굴 사진을 건네자 참가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왼쪽(긍정)으로 옮기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처럼 행동면역계는 외집단, 낯선 존재, 감염 가능성이 있는 대상을 회피하는 생물학적 기제를 갖고 있으며 그것이 혐오 감정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흑인 참가자도 유사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유전자와 마찬가지로 정치 성향과 관련된 유전자 역시 환경 요인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한국의 86세대 남성들에게는 진보 성향이, 이른바 ‘이대남’에게는 보수 성향이 두드러진 것은 생물학적 기반이 사회 구조적 조건에 반응한 결과라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생식 적령기에 놓인 남성에게 번식과 경제는 절박한 과제로 다가온다. 경제적 자원 부족으로 비자발적 독신 상태에 놓인 이른바 ‘인셀(involuntary celibates)’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기도 한다. 과거보다 경쟁이 심화된 경제·사회적 환경 속에 살아야 하는 ‘이대남’이 보수적인 표현형을 보이는 것은 생물적, 사회적 요인의 결과인 셈이다.
이처럼 보수성은 생물학적으로 보면 합리적이고 정당한 방어 기제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성향이 과도하게 발현되면 타인에 대한 공격성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이 문제다. 이민자, 성소수자 등 외집단을 향한 극우적 폭력이나 혐오가 대표적 사례다. 또한 권위와 위계 질서에 순응하고 권력에 복종하는 성향으로 이어지며 비과학적인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도 보수성의 부정적인 이면이다. 부정 선거 음모론에 유독 보수 성향 유권자가 취약한 것도 보수성의 본질과 무관하지 않다.
저자는 “인류라는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은 집단 이기주의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다”며 보수성의 한계를 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수 본능’은 인간의 보수성을 진화적·심리적·생물학적으로 조망함으로써 그 뿌리를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동시에 한계를 짚어보는 시도다. 불확실성 속에서 본능에만 기대지 않기 위한 지적 성찰의 출발점이 될만한 책이다. 1만 6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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