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혜순이 시집 ‘죽음의 자서전’으로 독일 ‘국제문학상’을 수상했다. 아시아인이 이 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며, 시집이 본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17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의 세계문화의 집(HKW)과 엘레멘타르타일헨 재단은 제17회 국제문학상 시상식을 열고, 최종 후보 6명 가운데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시인 김혜순과 번역자 박술, 울리아나 볼프를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제문학상은 번역문학 분야의 권위 있는 상으로, 매년 독일어로 번역된 현대문학 중 뛰어난 작품을 선정해 작가와 번역자에게 공동으로 수여한다. 상금은 작가에게 2만 유로, 번역자에게 1만5000 유로가 각각 주어진다. 2023년부터 시도 심사대상에 포함됐다.
심사위원단은 수상작에 대해 “‘죽음의 자서전’은 불교의 사십구재 전통에 기반한 마흔아홉 편의 연작시로, 죽음이라는 모국어를 언어로 옮긴 기적에 가까운 합창”이라며 “각각의 시는 개인적이면서도 존엄한 죽음을 호명하고, 초월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사후세계와의 대화를 시도한다”고 평가했다. 심사위원인 소설가 데니즈 우틀루는 “이 시집은 시적 언어가 저승의 문턱에서 만들어낸 울림을 귀 기울여 들을 수 있는 길을 연다”고 강조했다.
김혜순은 서울과 베를린을 잇는 화상 연결을 통해 “이 상을 통해 한국어 시가 독일 독자에게 닿을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며 “번역자 박술, 울리아나 볼프, HKW, 그리고 피셔 출판사 관계자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공동 수상자인 박술(39)은 서울 출신으로, 현재 독일 힐데스하임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비트겐슈타인, 니체 등 주요 철학자의 저작을 한국어로 번역했으며, 시인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함께 번역을 맡은 울리아나 볼프(46)는 베를린 출신 시인이자 번역가로, 최돈미를 비롯한 여러 시인의 작품을 독일어로 소개한 바 있다. 두 사람은 대산문화재단의 번역 및 출판 지원을 받아 이번 독일어판을 완성했다.
‘죽음의 자서전’은 2016년 문학실험실에서 출간된 김혜순의 열두 번째 시집이다. 시인은 2015년 지하철역에서 쓰러진 경험을 계기로, 메르스 사태와 세월호 참사 등 사회적 비극을 떠올리며 마흔아홉 편의 시를 완성했다. 이 시집은 2018년 영어로 번역돼 캐나다 ‘그리핀 시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2021년 스웨덴 ‘시카다상’, 2024년에는 ‘날개 환상통’의 영어판으로 미국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까지 수상하며 세계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김혜순은 2019년 수상 당시 “국가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죽어간 불쌍한 많은 영혼들에게 이 수상의 영광을 드리고 싶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한편 최근 ‘죽음의 자서전’ 수상을 계기로 최근 발간된 ‘김혜순 죽음 트릴로지’(문학과지성사, 2025)가 주목받고 있다. 이 책은 ‘날개 환상통’(2019), 2026년 영역본 출간을 앞둔 최근작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2022)와 함께 3부작으로 구성됐다. ‘죽음의 자서전’ 전편 외에도 신작 산문 ‘죽음의 엄마’와 2022년 4월 ‘뉴욕 타임스’ 매거진에 소개되어 반향을 일으킨 시 ‘고잉 고잉 곤(Going Going Gone)’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중국어 등 5개 언어로 번역되어 함께 수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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