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대규모로 공장을 짓고 있는데 여기에 들어가는 소재나 부품까지도 국가별 상호관세와 품목별 관세 등 이중 과세의 부담을 지게 될 수 있습니다. 이는 투자를 하지 말라는 얘기나 다름없습니다.”
미국 내 사업 확대를 위해 현지에 대규모 공장을 건설 중인 수출 대기업 A사 관계자는 16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한미의원연맹과의 비공개 간담회에서 발언 기회를 얻자 이같이 호소했다. 간담회에 참석한 삼성전자(005930)·SK하이닉스(000660)·현대자동차·LG에너지솔루션(373220) 등 국내 주력 수출 기업들은 미국의 ‘관세 폭탄’에 따른 우려를 쏟아내며 조속한 협상 타결을 요청했다.
기업들은 대규모 관세 부과에 따른 불확실성을 호소할 뿐만 아니라 상당한 대미 투자 성과에도 불구하고 고압적인 태도를 고수하는 미국에 대한 서운함도 쏟아냈다. B사 관계자는 “최근 2년간 미국의 전체 외국인 투자 중 1등이 한국 기업”이라며 “이 같은 사정이 전혀 감안되지 않고 있는 상황을 미국에 어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8월 1일 25%의 상호관세 부과를 앞두고 여야 의원들도 기업의 생생한 호소를 들으면서 협상 타결의 의지를 다졌다. 한미의원연맹 소속인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간담회 후 기자와 만나 “기업들이 두 번, 세 번에 걸쳐 우려를 전하는 것을 들으니 ‘이거 큰일 났구나’ 싶었다”며 “기업들의 걱정이 너무 크더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한국경제인협회 주관으로 열린 이날 간담회에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반도체), 현대차(005380)(자동차), LG에너지솔루션(배터리), 포스코(철강), HD현대중공업(329180)·한화오션(042660)(조선) 등 주요 수출 기업 7곳이 참여했다.
기업들은 협상 불발 시 품목별 관세에 국가별 상호관세까지 더해지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현재 미국은 모든 국가에 자동차 25%, 철강 50% 등 품목별 관세를 적용하고 있다. 한국 배터리 기업들의 주요 원료인 구리에도 다음 달부터 50%의 관세가 부과된다. 한국의 대표 수출 품목인 반도체 역시 품목별 관세가 매겨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에 더해 다음 달 1일부터 한국에 25%의 상호관세를 추가로 물리겠다며 협상을 요구하고 있다.
여야와 정부는 심각한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초당적인 협력에 나서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날 간담회에는 여야 국회의원들뿐 아니라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와 외교부가 참여해 현재 협상 진행 상황과 향후 전략 등을 공유했다. 여야 의원들과 정부는 기업 간담회 후 별도의 논의를 통해 미국 의회 설득 전략을 구상했다.
여야와 정부는 대미(對美) 수출 흑자가 90조 원에 달하는 상황에서 일부 수익을 양보하는 게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모든 산업에서 일괄적으로 관세 성과를 이룰 수 없으므로 반드시 지켜야 할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는 식으로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다.
한미의원연맹 간사인 조정훈 국민의힘 의원은 “우리가 미국에서 90조 원의 흑자를 내는데 이것을 어떻게든 조금은 줄여줘야 한다”며 “이를 줄이기 위해 세부 조정을 하다 보면 A 기업에는 유리하고 B 기업에는 불리한 식으로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여당 측 간사인 김영배 의원은 “전체적으로 대표단이 가서 (미국 의회에) 얘기해야 할 포인트들을 논의하는 자리였다”고 설명했다.
기업들은 관세 협상 타결을 기대하면서도 자칫 자사가 ‘양보’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고 있다. 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한 기업 관계자는 “특정 산업을 지키기 위해 우리 산업이 양보된다면 심각한 상황이 된다”며 “협상단에 경제 안보 측면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협상 전략이 어떻게 짜일지 모르겠다”고 우려를 전했다.
한미의원연맹은 조정식 민주당 의원과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을 단장으로 총 13명의 대표단을 꾸려 20일 미국으로 출국한다. 민주당과 국민의힘 외에 조국혁신당(이해민 의원), 개혁신당(이준석 의원)도 포함됐다. 같은 기간에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도 방미해 투트랙으로 대미 협상에 나서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대표단은 미국 현지에서 미국 연방 상원의 앤디 김 의원과 하원의 영 김 의원 등 한국계 의원들을 만나 의회 내 우호적인 여론 조성을 당부할 계획이다. 지한파 의원 외에도 각 산업별로 영향력이 높은 의원들을 최대한 만나 설득하기로 했다. 김영배 의원은 “미국은 하원의 세입위원회가 굉장히 중요하다. 세입위원들과 트럼프 대통령과 친한 의원들을 만날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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