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한 뉴스 채널은 지난 수년 간 미국 정부가 지원하는 미국의 소리(VOA)와 중국중앙텔레비전(CCTV)의 보도를 모두 다뤘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중국 국영미디어의 보도만 나오고 있다. 트럼프 미 행정부가 지난 3월 VOA를 운영하는 미국 국제방송청(U.S. Agency for Global Media·USAGM) 해체를 선언한 탓이다. VOA의 빈 자리는 중국 매체들이 빠르게 채우고 있다. 수십 년간 미국의 입장을 전세계에 대변해 온 VOA가 사라지면서 그간 쌓아온 미국의 미디어 외교 정책도 무너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3일(현지 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3월부터 VOA 방송이 중단되면서 중국 매체들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대표적으로 태국 국영 MCOT 방송사에서는 VOA가 정기적으로 나타나던 자리를 중국 미디어 매체가 차지했다. 아프리카에서도 중국 미디어의 확장세가 무섭다. 중국국제텔레비전(CGTN)은 지난 3월 아프리카에서 방송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중국국제방송(China Radio International) 역시 아프리카 현지 청취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나이지리아에서 널리 사용되는 언어인 하우사어·요루바어·이그보어로 방송 범위를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에티오피아는 5월, 중국 국영미디어와 손을 잡고 에티오피아 국영텔레비전에서 방송될 중국 TV 프로그램, 다큐멘터리, 만화 모음인 ‘차이나 아워(China Hour)’를 출범 시켰다.
이런 상황에 중국 미디어들은 미소짓고 있다. 지난 3월 중국 관영 환구시보(Global Times)의 전 편집장 후시진(Hu Xijin)은 VOA의 마비에 대해 "중국인들은 미국의 반중국 이데올로기 요새가 내부에서 무너지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고 소셜미디어에서 언급했다.
미국 내에서는 북한이나 중국, 이란 등에서 미국의 입장을 대변할 수단을 잃었다며 VOA의 부활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WSJ는 “VOA의 철수로 북한과 이란을 포함한 가장 폐쇄적인 사회에서 수년에 걸쳐 구축된 방송 기능이 차단됐다”며 “청취자들이 미국의 관점을 들을 수 없게 됐다”고 짚었다. 키신저 중미연구소 소장을 지낸 로버트 데일리 역시 “우리는 중국에서 여론에 영향을 미칠 기회를 포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VOA는 중국은 물론 북한에서도 청취층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23년 북한 탈북자와 난민, 여행자 등을 대상으로 한 미국의 조사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외부 방송을 듣는 것이 불법이지만 일부는 VOA와 자유아시아방송 프로그램을 정기적으로 들었다고 밝혔다. 데일리 전 소장 역시 “최근 중국 여행에서 많은 싱크탱크 리더들, 대학생들, 교수들이 VOA의 내용을 언급해 놀랐다”고 말했다.
VOA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메시지에 맞서기 위해 1942년 미국 정부에 의해 만들어졌다. 독일어로 송출된 VOA의 첫 메시지는 "뉴스는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 우리는 당신에게 진실을 말할 것이다"였다. 냉전시대 공산주의의 확산에 맞서기 위해 역할이 확대됐으며 최근까지 49개 언어로 100개 이상의 국가에 뉴스와 정보를 전송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연방 정부 효율화를 이유로 2026년 예산에서 USAGM 몫을 제외시키며 지난 3월부터 방송이 사실상 중단됐다. 트럼프 대통령의 글로벌미디어 수석 고문인 카리 레이크가 “이 기관이 무능하고 정치적으로 편향되어 있으며 그 자체가 국가 안보 위협”이라고 비난했다.
미국 연방 법원은 지난 4월 VOA의 신뢰성 회복을 위해 일부 프로그램 복원을 명령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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