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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착한 정책의 역설

황정원 마켓시그널부장

최저임금 급상승에 영세 자영업자 타격

주4.5일 근로제 도입 목소리 커지지만

생산성 개선 없인 기업 경쟁력만 잃어

'선한 정책에 발목' 전철 되풀이 말아야

황정원 마켓시그널부장




얼마 전 식당을 갔을 때의 일이다. 테이블 오더로 주문을 해 놓고 한참 이야기를 나눴는데도 음식이 나오지 않았다. 종업원을 불러 물어보니 주문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답이 돌아왔다. 메뉴를 다 골라 놓고 마지막에 ‘확인’ 버튼을 누르지 않았던 것이다. 카페와 식당의 키오스크 주문이 급격히 확산되면서 가끔 땀을 삐질 흘리며 당황해하는 어르신들의 모습도 종종 보게 된다. 이제는 일상화된 무인 주문은 기술 발전의 영향일까, 아니면 최저임금 상승 때문일까. 2021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데이비드 카드 UC버클리 교수는 최저임금이 일자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쟁을 촉발시킨 바 있다. 이 논제는 아직도 진행형이지만 적어도 한국에서는 소상공인들이 인건비 부담을 줄이려는 목적으로 키오스크를 속속 도입했다고 본다.

이른바 ‘소득 주도 성장’을 내걸었던 문재인 정부는 5년간 최저임금을 총 42% 인상했다. 그 결과 올해 최저임금은 처음으로 1만 원을 넘긴 1만 30원이다. 취약한 저임금 근로자를 보호하려는 최저임금은 지불 능력 한계에 처한 영세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에 치명적이었고, 일자리를 잃게 만든 최저임금의 역설로 돌아왔다. 내년에 적용할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심의는 올해도 법정 기한을 넘겼다. 1988년 최저임금제 도입 이후 시한을 지킨 건 단 9번뿐이다. 협상이 빨리 끝났다는 건 어느 한쪽이 큰 양보를 했을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매년 새벽에나 최저임금이 극적으로 타결되는 건 명분 때문이기도 하다. 자칫 “고작 이 정도 결과물을 갖고 오면서 벌써 협상을 마쳤냐”는 비판을 등 뒤의 동료들로부터 받을 수 있어서다.

최저임금과 함께 현시점에서 가장 걱정스러운 정책은 이재명 대통령의 노동 공약 중 하나인 주4.5일 근로제다. 삼성을 경험한 많은 전문가들은 삼성전자가 반도체 경쟁력을 잃었던 요인 중 하나를 주52시간 근로제에서 찾는다. 며칠 밤을 새워 연구하던 문화가 주52시간 적용 이후 사라졌고 삼성전자는 고대역폭메모리(HBM) 경쟁에서 뒤처져 반도체 2위로 밀려났다. 반도체 시장에서는 한번 1위에서 2위로 떨어지면 다시는 1위로 올라선 역사가 없다. 근로시간 단축이라는 방향성 자체는 동의하지만 우리 사회에 적용이 너무 빨랐고 유연함이 없었다는 아쉬움이 크다. 뒤늦게나마 반도체 산업에 주52시간제 완화를 적용하려는 반도체특별법이 논의되고 있으나 국회에서 공전하는 상황이다.



같은 월급을 받으면서 근로시간을 줄이려면 노동생산성이 획기적으로 높아져야 한다. 노동생산성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 근로시간을 축소하면 소득 감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우리나라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약 51.0달러로 26위에 불과하다. 미국과 독일 등은 한국보다 1.6배가량 높은 수준이다. 이처럼 1인당 생산성이 떨어지는데도 일부 대기업 노조를 중심으로 임금 변동 없는 주4.5일제 도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질 분위기다.

민주노총 위원장 출신인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는 출근 첫날 주4.5일제에 대해 “반드시 가야 할 길”이라면서도 “주4.5일제가 어려운 기업이 있다면 무엇이 어렵게 하는지 잘 살펴보겠다. 중요한 문제들에 노사정이 머리를 맞대고 공동의 이익을 찾아가는 길을 모색하겠다”고 말했다. 당위나 명분으로 밀어붙이지 않겠다는 발언은 다행스럽다.

우리 앞에는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 등의 과제가 산적해 있다. 고소득자 증세와 같은 정책은 보수 정부에서, 노동 개혁은 진보 정부에서 해야 한다. 지금도 노동계 내부에서는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비판하지만 김대중 정부 시절 파견법을 도입한 노사정 대타협과 같이 지지층의 희생을 수반한 개혁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문재인 정부의 발목을 잡은 것은 최저임금을 포함한 ‘착한 정책의 역설’이었다. 2021년 법정 최고금리가 연 20%로 낮아진 뒤 오히려 서민들이 제도권 밖의 불법 사금융으로 내몰렸고, 임차인 보호를 위해 도입한 계약갱신청구권·전월세상한제 등의 임대차 3법은 전월세 가격을 폭등시켜 전세 대란을 불러왔다. 주4.5일제 파장도 당장 나타나지는 않는다. 새 정부에서는 선한 정책의 역설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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