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익은 감빛은 노을보다 더 붉고 보름달보다 더 탐스럽게 차올랐다. 보라색 등나무꽃은 영롱하게 반짝이고, 검은 목단은 기품있고 당당하다. 잊고 지낸 우리의 색(色)이 이런 것이었을까?
기생 출신 여성 화가 람전(藍田) 허산옥(1924~1993)의 탄생 100주년 기념전시가 서울 종로구 낙원상가 4층 d/p에서 10월 30일부터 11월 10일까지 열렸다. d/p의 ‘유산 연구실’ 프로젝트 일환으로 인물미술사연구소가 함께 기획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소장품 등 허산옥의 30여 점 유작을 선보였다. 20세기 초 남성화가들이 외면했던 색의 감각적 표현, 꽃과 과일 등 일상적 소재의 다양한 미감이 눈을 즐겁게 하는 전시다.
1924년 3월 3일 전북 김제 부량면에서 10남매 중 9째로 태어난 허산옥의 원래 이름은 허귀옥. 가난 때문에 열 여섯이던 1940년 남원권번에 입소했다. 권번(券番)은 일제강점기의 기생 활동 중개소다. 기생이름 산옥(山玉)은 여기서 얻었다. 1943년 전주권번으로 가 기생살이를 시작했고 1945년 해방과 함께 권번제가 폐지되며 기생신분을 벗어났다. 보통 음악 분야로 진출한 기생 동료들과는 달리 미술을 택했다. 이때부터 아호 ‘람전’을 사용했다.
전주 출신 효산 이광열(1885~1967)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의재 허백련(1891~1977)을 만나 그의 문하생으로 입문했다. 옛 권번 자리였던 일본식 한옥을 인수해 요리집 ‘행원’을 운영하면서 풍류가객의 모임터를 꾸렸다. 전주를 방문한 화가 변관식, 이상범, 김은호, 이용우, 이응노가 이곳을 다녀갔다. 명창 박초월, 김소희, 임방울과 교류하고 후원했다. 경영으로 번 돈을 전주지역 장학사업에 쏟아부었다. ‘전주의 마지막 기생’은 ‘전주 문화예술계의 대모’가 됐다.
그럼에도 ‘화가 허산옥’은 소수자 중 소수자였다. 한국화와 동양화가 서양화에 비해 소외된 것이 현실이고, 더욱이 여성화가라 주목받을 기회도 적었다. ‘람전 허산옥 탄신 100주년 추모 모임’에 따르면 허산옥은 1960년 제9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묵국(墨菊)’으로 입선한 이후 , 1980년까지 총 15차례 입선을 거듭했다. 국전에서는 4회 이상 연속 수상하면 추천작가 자격을 얻을 수 있는데 번번이 중도 낙선을 당했다. “다른 남성 작가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남성 심사위원들에 의한 차별이었음을 알 수 있다”는 게 연구자들의 분석이다.
허산옥의 작품을 대거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에 기증한 미술사학자 최열은 “주류 미술계에서는 수묵채색화를 19세기 이전 봉건양식의 반복일 뿐 ‘시대의 양식’이 아니라 ‘사멸한 양식’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라며 “우리 미술의 서사를 반영하고 옹호해야 할 국공립미술관마저 ‘서구미술’의 서사를 기준으로 삼아 수묵채색화를 변방 하위 서열로 배치당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미술계가 여성 작가에게 인색했기에 기생출신 화가는 관심조차 받기 어려웠다. 최열은 “강건한 필력과 섬려한 색채, 20세기 후반 사군자와 채색화조의 세계를 우아한 경지로 올려놓은 세련된 형식, 설씨부인과 신사임당을 잇는 여성미술사의 계보, 평생 화가로 일가를 이룬 미술가 정체성” 등을 이유로 람전 허산옥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주장했다.
그림으로 만나는 허산옥은 또렷하고 새로운 자신만의 화풍을 보여준다. 김소연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파초·소나무·대나무 같은 ‘군자적’ 주제를 확장시켜 꽃으로는 장미와 동백, 과실류로는 감,포도,호리병박 등을 묘사해 표현의 범주를 넓혔다”면서 “여타 문인화조화에 비해 새가 등장하는 비율이 많으며 대개 참새·백두조·팔가조 같이 상서롭고 고귀한 조류들 보다는 기쁨과 건강, 해로를 기원하는 흔하고 작고 평범한 새들을 선호했다”고 평했다.
흙없이 뿌리를 드러낸 노근란과 자잘하게 핀 들꽃 등의 화조화는 다분히 허산옥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나라잃은 설움부터 세상이 눈여겨 봐주지 않으나 묵묵히 제 향기를 풍기는 작은 꽃의 서럽고도 당당한 아름다움까지. 그림에서 잊힌 화가의 해사한 얼굴이 보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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