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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1558년, 프랑스 칼레 수복

메리1세 짝사랑의 대가

프랑스군의 칼레 수복 묘사도.




1558년 1월 8일 프랑스 북부 칼레. 기즈 공작 프랑수아(당시 39세)가 이끄는 2만 7,000여 프랑스군에 2,600여 영국 수비대가 성문을 열었다. 영국은 충격에 빠졌다. 청교도들을 탄압해 ‘블러디 메리(Bloody Mary)’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영국 여왕 메리 1세는 혼절해 버렸다. 상심한 메리 1세는 여러 병세가 겹쳐 그해 11월 42세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임종 직전 그는 두 단어를 끊임없이 중얼거리다 죽었다. ‘펠리페…칼레…펠리페…칼레….’

여왕은 ‘내 심장에 칼레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을 것’이라는 말도 남겼다. 왕실 전통에 따라 시신을 미라로 만들기 위해 메리의 장기를 들어내니 심장이 검은색이었다는 얘기가 내려온다. 국가가 입은 상실과 좌절감은 더 컸다. 노르망디공 윌리엄이 영국을 점령한 이래 유럽 대륙에서 유지하던 영토가 완전히 사라진 탓이다. 영국 국왕이 다스리던 대륙의 땅이 프랑스 국왕보다 많았던 시절도 있었으니 상실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칼레가 영국 영토로 편입된 시기는 백년전쟁 초기인 1347년. 에드워드 3세와 흑태자에 의해서다. 자주 회자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원형이 나온 바로 그 시기다. 프랑스 기사단을 격멸한 직후, 가볍게 접수하려던 어촌 칼레가 11개월 넘게 저항하자 에드워드 3세는 ‘씨를 말리라’는 엄명을 내렸다. 분노한 영국 국왕 앞에 프랑스 귀족들이 엎드려 ‘우리가 죽겠으니 무고한 양민을 살려달라’고 간청한 것이 근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시발점. 영국은 백년전쟁에서 패배하며 프랑스 영토를 모두 잃은 후에도 칼레만큼은 굳건히 지켜왔다.



경제적 가치도 컸다. 프랑스인을 추방하고 자국민을 이식한 영국은 칼레를 최대 무역항으로 키웠다. 관세 수입이 영국 왕실 주머니의 3분의 1을 채운 적도 있다. 왕에게 돈을 빌려주고 독점권을 행사하며 200년 넘게 번영하던 무역상과 양모업자들도 칼레의 상실로 재산을 모두 잃었다. 스페인과 전쟁을 벌이던 프랑스는 영국의 불만과 반격을 막으려 ‘80년 뒤에 돌려주겠다’는 덧없는 약속으로 영국인의 자존심을 지켜주며 칼레를 완전히 되찾았다.

영국이 칼레를 싱겁게 빼앗긴 이유는 사랑에 눈이 먼 메리 1세의 판단 착오. 아홉 살 연하인 남편이자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부탁을 받자 아무런 이득도 없이 프랑스·스페인 전쟁에 끼어들어 화를 불러들였다. 영국에 다행이었던 점은 후임 엘리자베스 1세의 리더십. 섬나라로 전락한 데 좌절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해양 세력을 키워 대영제국의 기틀을 잡았다. 어떤 위기에도 기회는 있다.
/권홍우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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