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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1563년 트리엔트 공의회 폐막

399년간 가톨릭 교리 중추





1563년 12월 4일 신성로마제국 트리엔트(오늘날 이탈리아 북부 트렌토). 길고 길었던 가톨릭 교회의 공의회(Council)가 마침표를 찍었다. 가톨릭 역사상 21개 공의회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지만 트리엔트 공의회는 근·현대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교회사에서는 의미가 더 깊다. 306년 세월이 흐른 1869년에서야 다음 공의회인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됐으니까. 가톨릭의 본격 개혁이 1962년 2차 바티칸 공의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트리엔트 공의회 시대는 실질적으로 400년에 이른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소집 목적은 1545년 개회사에 담겨 있다. ‘날로 강해지고 있는 이단에 대한 대응 방안 모색과 교회의 부패 척결.’ 교회는 마르틴 루터 등 종교개혁가들을 ‘이단’이라 규정하며 경계했으나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전에는 종교개혁가들을 겁주거나 몇몇을 죽이면 잠잠해지는 경험을 겪었기 때문이다. 루터 등이 압력과 회유에도 무릎 꿇지 않자 마련한 게 공의회다. 막상 추기경과 교구장 등을 모두 한자리에 모으기는 쉽지 않았다.

소집론이 나온 것은 1521년. 95개 조 반박문을 쓴 루터에 대한 지지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소집 건의가 줄 이었다. 1532년에는 교회가 거론하고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까지 동의했으나 교황 클래멘트 7세의 사망으로 추진 동력을 잃었다. 1536년 즉위한 교황 바오로 6세는 공의회 개최와 관련해 루터파의 역공에 몰렸다. 준비위원회가 마련한 개혁안 가운데 ‘면벌부는 도시에 한해 연 1회만 발행한다’는 조항을 입수한 루터파는 인쇄물을 대량 배포하며 교회를 비웃었다.



어려움 끝에 개회했으나 주교들이 모이지 않거나 교황의 사생아에 대한 영지 수여 등의 문제로 중단된 적도 있다. 전쟁에 빠진 황제 때문에 소집이 미뤄지면서도 트리엔트 공의회는 25차례 전체 회의를 통해 경전의 범위에서 구원의 정의, 성례 등의 규정과 교리의 골격을 짰다. 요즘에도 일부 교리와 의식은 그대로 내려온다. 트리엔트 공의회가 제시한 교리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교파도 있다.

다른 신앙을 아예 부인했던 교리 탓일까. 막스 베버는 18세기에 가톨릭권 국가들의 경제력이 현저하게 낮다는 판단 아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썼다. 종교 간 빈부 격차는 줄었다지만 오늘날 유럽에서는 신교와 구교를 막론하고 쇠퇴 일로다. 우리는 다르다. 재물을 지키려 전체 사회에 교회법을 들먹이고 성직 세습을 일삼는 종파가 주변에 널렸다. 16세기로 착각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권홍우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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