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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1864년 日 이케다야 사건

개혁을 향한 몸부림과 칼부림

사건이 일어난 이케다야 여관 터. /위키피디아




1864년 7월8일(일본력 6월5일) 교토 기야마치길 이케다야(池田屋) 여관. 신설 치안조직 신센구미(新選組)가 밤 10시 무렵 여관을 에워쌌다. 목표는 과격 존왕양이파 사무라이 20여명. 포위를 마친 신센구미는 4명을 앞세워 여관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통로가 좁아 많은 인원을 투입하기 어려웠다. 곤도 이사미 국장을 비롯한 신센구미 4명과 사무라이 20여명이 한밤중에 싸운 ‘이케다야 사건’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핵심인재를 잃어버려 유신이 늦어졌다는 평과 젊은 지사들을 자극해 오히려 개혁을 앞당겼다는 해석이 병존한다.

소설가 시바 료타로의 견해는 후자에 가깝다. ‘이케다야 사건이 없었다면 유신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정도다. 과연 어느 쪽 견해가 맞을까. 상반되는 평가와 달리 분명한 사실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신센구미의 존재를 아는 한국인이 의외로 많다. 일본 만화의 영향 때문이다. 일본인들의 기억은 더욱 강하다. 수많은 시와 소설, 연극과 영화가 만들어졌다. ‘주신구라(忠臣藏·억울하게 죽은 주군의 원수를 갚은 47인의 사무라이가 주군 무덤에서 전원 할복한 1703년 사건)’와 함께 일본인의 정서를 파악할 수 있는 양대 사건으로 손꼽힌다.



일본인들이 이케다야 사건에 열광하는 것은 ‘봄철 차가운 바람에 벚꽃처럼 지는’ 무사들의 사생관이 반영돼 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즉사한 12명이 대부분 20대였다. 개항 후 10년, 교토는 전국의 무사들로 북적거렸다. 쇼군의 권세에 밀려 오랫동안 쇠락했지만 존왕양이론이 확산되며 왕이 머무는 교토가 정치 중심지로 떠올랐다. 신센구미는 막부가 교토의 안전을 위해 신설해준 조직이지만 실은 일본 왕을 감시하는 역할도 맡았다. ‘일부 과격한 존왕양이론자들이 교토에 불을 지르고 왕을 납치해 막부 타도의 전면에 내세울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한 신센구미의 대응이 바로 이케다야 사건이다.

사건 이후 일본은 빠르게 변해갔다. 음모의 배후로 찍힌 조슈번과 막부의 두 차례 전쟁, 반목하던 사쓰마번과 조슈번 간 비밀 군사동맹, 막부 퇴진, 메이지유신까지 숨 가쁘게 이어진 일련의 개혁에 공통점이 하나 있다. ‘기득권 포기.’ 외세 침략 앞에 분열하기보다 일본 전체를 위해 자기기 속한 집단의 권리를 스스로 버렸다. 쇼군은 대대로 내려온 통치권력을 버렸고 무사들은 특권을 내려놓았다. 다이묘(지방영주) 260여명의 저항이나 복수도 없었다. 동서고금을 통해 유례를 찾기 어려운 집단적 특권 포기가 일본 근대화를 이끈 셈이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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