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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계관시인 페트라르카의 짝사랑

14세기 첫 르네상스인 손꼽혀

라우라를 처음 본 페트라르카./위키미디어




니콜로 마키아벨리와 윌리엄 셰익스피어. 행정관료 출신의 ‘위험한 사상가’로 불리는 전자와 4대 비극으로 유명한 후자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출생 기준으로 95년, 피렌체와 런던이라는 시공의 차이를 넘어 둘은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1304~1374)의 영향을 받았다. 마키아벨리부터 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이래 한 몸이던 정치와 윤리를 분리한 문제작 ‘군주론’의 끝 문장을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맺었다. ‘광폭한 침략에 맞서/숙명에 따라 무기를 들었노라/전투는 바로 끝나리니/이탈리아의 가슴에/고대(로마)의 용맹이 살아 있기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장식한 문구는 페트라르카의 ‘칸초니에레’ 14편. 크고 작은 도시국가로 분열되고 교황청마저 외세의 침략에 휘둘리는 조국 이탈리아에 대한 걱정과 충정에서 두 사람은 인식을 공유한다. ‘로마와 파리가 동시에 지정한 최초의 계관시인’인 페트라르카의 대표작은 366편의 14행 서정시 칸초니에레. ‘모방의 천재’인 셰익스피어는 이를 본떠 소네트 154편을 남겼다. 칸초니에레는 음률을 비롯한 시적 정체성을 가진 가사로 유럽 서정시의 원형으로도 평가받는다. 밀턴과 릴케, 보들레르도 그를 즐겨 인용했다.



페트라르카의 시상은 대부분 한 여성에게 나왔다. ‘정확하게 1327년 4월 여섯째 날 이른 시각/나는 그 미로에 들어갔으나/아직 출구를 못 찾았다네/(211편)’. 23세 청년이 만난 사랑은 아팠다. 연모의 대상이 17세의 유부녀였으니까. ‘그 아름다운 두 눈에/나는 상처 입었나니/약은 오로지 그녀 뿐이라네/(이하 생략, 75편)’. 평생토록 사랑을 이루지 못한 그는 글을 쓰고 산에 올라 최초의 등정가, 현대 이탈리아어를 만든 개척자로도 불린다. 중세를 ‘암흑’으로 바라본 최초의 르네상스인으로도 손꼽힌다.

사랑은 암흑을 이겨내는 힘인지도 모른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3총사’라는 단테 알리기에리는 베아트리체, 조반니 보카치오는 피암메타(데카메론에 나오는 7명 숙녀 중의 하나)를 죽도록 사랑하며 글을 썼다. 페스트라는 역병도 고전을 탐구하고 진실을 찾고 글 쓰는 그들의 열정을 이기지 못했다. 부모와 아들, 짝사랑한 라우라를 페스트로 잃은 페트라르카는 사람들이 독서 하고 글을 쓰는 습관이 역병보다 빨리 퍼지는 데 자신이 기여했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인문학 열풍이 분다는 우리는 어떠한가. 펜을 쥔 채 죽었다는 페트라르카를 떠올리며 묻는다. 코로나19에 가린 봄, 우리는 얼마나 사랑하고 읽고 쓰는가.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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