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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언어정담] 시인과 함께 걸어 더욱 아름다운 길

작가

문학을 통한 상처 치유의 출발점은

자신을 작품 속으로 여행 보내는 것

타인 이야기가 내 마음에 둥지 틀면

나만의 복잡한 번민·열망 가라앉아

정여울 작가




힘들 때마다 생각나는 문장들이 있어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순간이 있다. 얼마 전 시를 암송하며 어두운 밤길을 걸어간 적이 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여기까지만 암송해도 이미 밤길을 혼자 걷는 두려움은 사라졌다.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의 시 ‘빈 집’을 낭송하며 거닐다보니, 슬픈 마음과 우울한 감정이 찬찬히 잦아들었다. 시 한 편이 마치 친구처럼 내 곁에서 함께하는 느낌, 시인과 함께 어두운 밤길을 걷는 느낌이었다.



내가 굳이 기억하려고 애쓰지도 않았는데 20여 년 전 외웠던 이 시를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암송하는 나 자신에게 깜짝 놀랐다. 그만큼 이 시의 아름다움은 너무도 각별해서 무의식에서조차 잊지 않으려 발버둥을 쳤나보다. 시를 혼자 묵독하는 것이 1인분의 푸짐한 한상차림 음식이라면, 시를 소리내어 낭송하고 수많은 사람들과 나누는 것은 온갖 산해진미가 그득히 차려진 밥상에서 동네 사람들을 모두 모아 놓고 잔치를 벌이는 듯한 기쁨이다.

문학을 통한 상처의 치유가 시작되는 출발점은 내 안에만 웅크리고 있거나 나 자신을 학대하는 자신을 잠시 문학작품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내는 것이다. 내 고민을 구체적으로 날것으로 표출하는 것보다 시의 함축적 언어로 한 번 걸러내 표현하는 것. 일상의 상투적인 어법을 벗어난 자리에서 나의 고민을 비로소 거리를 두고 마치 남의 일처럼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아름다운 시를 바라보듯 내 삶을 바라보는 이 마음의 거리감. 이것이 바로 나 자신을 ‘지나치게 뜨거운 주관’과 ‘지나치게 차가운 객관’ 그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최고의 미적 거리이며 자신을 끝내 보듬을 수 있기 위한 최소한의 치유적 거리다. 시나 소설이라는 영롱한 프리즘을 통해 우리 마음을 비춰보면 온갖 복잡한 번민으로 들끓고 있는 마음이 명경처럼 환해진다. 타인의 이야기가 내 마음 속에 둥지를 틀면서 나만의 고민과 열망으로 꽉 차있는 마음 속 해일이 가라앉기 시작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시를 읽으면 내 삶을 타인의 이야기처럼 바라보고 타인의 삶을 나의 삶처럼 바라볼 수 있는 상대화의 시선이 생긴다. 내 고민으로 인해 내 안에서 화산이 폭발할 것만 같은 순간. 소리 내어 천천히 시를 읽어보는 조금은 엉뚱한 모험을 시작해 보자. 집에 있는 명작소설은 물론 학창시절 읽었던 문학 교과서의 한 대목이라도 좋다. 엉뚱한 모험이지만 결코 힘들지는 않다. 오히려 분노로 인해 숨이 가쁘던 호흡이 잦아들고 내 목소리를 차분히 들어주는 ‘또 하나의 나’를 만남으로써 ‘분노하는 나’의 일그러진 얼굴을 비로소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

최근에는 헤세의 시 ‘여행의 기술’을 읽으며 슬픔을 가라앉혔다. ‘목표만을 좇는 눈은/떠도는 재미를 알지 못하고/여로마다 기다리고 있는/숲과 강과 갖가지 장관도 보지 못한다./나는 떠도는 비결을 계속 배워 나가야 한다./순간의 순수한 빛이/동경의 별 앞에서도 바래지지 않도록.’ 마음에 위안을 주는 작품들은 이런 작품처럼 해맑고 영롱한 시인의 시선으로 온갖 허영과 욕망에 찌든 우리 마음의 눈을 씻어준다. 헤세의 시는 아주 엷은 파스텔톤의 물감에 물을 듬뿍 섞어 붓의 힘을 쫙 빼고 그린 수채화 같은 느낌이다. 이런 시를 읽고 있으면 오직 목표를 향해 질주하던 날카로운 마음이 둥글둥글해진다. 정해진 목표만을 추구하느라 ‘떠도는 비결’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한 순간 스쳐가는 존재의 빛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마음의 눈을 되찾고 싶어진다.

당신이 소리내어 시를 읽을 수 있다면, 당신은 아직 괜찮은 것이다. 당신이 소리내어 시를 읽는 모습을 사랑하는 이와 나눌 수 있다면, 당신은 당신 안에 이미 스스로를 치유할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시를 읽은 기억으로 오늘의 아픔을 어루만질 힘이 있다면, 힘들 때마다 ‘시를 한 편 읽어볼까’하고 스스로를 추스를 수 있다면. 당신은 자기 안에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최고의 항우울제를 이미 지니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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