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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1971년 테헤란 협정

1차 석유파동 전조

1973년 ‘석유 없음’을 알린 미국 주유소의 표지판. 1971년 테헤란 협정은 석유 위기의 전조였다. /플리커




1971년 2월14일 이란 수도 테헤란.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24개 서방 석유회사들이 협정을 맺었다. 골자는 가격 인상과 이익 배분구조 변경. 먼저 원유 1배럴당 가격을 35센트 오른 2달러14센트로 못 박았다. 물가 상승(인플레이션)에 따른 산유국의 실질수입 감소를 막기 위해 매년 2.5%씩 자동으로 유가를 인상한다는 조항도 따라붙었다. 산유국과 석유회사가 이익을 반씩 나눠 갖는다는 이익반분원칙도 20년 만에 깨졌다. 산유국들은 최소한의 몫을 55%로 올렸다. 석유의 역사에 대한 기념비적인 저작 ‘황금의 샘(The Prize)’을 쓴 대니얼 예긴은 이 협정을 이렇게 평했다. ‘원유 수급의 주도권이 석유회사에서 산유국으로 넘어간 분기점.’

‘7공주(The Seven Sisters·7개 석유 메이저)’를 비롯한 석유회사들의 수입은 연간 12억달러가 줄어들었다. 석유회사들은 왜 불리한 협정을 맺었을까. ‘개구리 뛰기’로 인한 더 큰 손실을 막기 위해서다. 개구리 뛰기란 산유국들의 경쟁적 유가 인상. 이미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가 이익의 55%를 가져가게 된 상황에서 다른 산유국들의 추가 인상을 방지하려 개별국가가 아닌 OPEC 전체를 상대하는 부담을 떠안으며 협상을 벌인 끝에 테헤란 협정을 받아들였다. 약 한 달여 동안 계속된 회의를 사실상 주도한 팔레비 이란 국왕은 “더 이상의 개구리 뛰기는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으나 두 달이 못돼 허언이 돼버렸다.



테헤란 협정의 테이블에 앉지 않았던 리비아는 4월 초 유가를 추가로 9% 올렸다. 인플레이션에 따른 자동 인상분을 제외하고는 1975년까지 유가를 동결하겠다는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1973년 10월 터진 4차 중동전에서 위기에 몰린 이스라엘을 미국이 노골적으로 지원하자 아랍 산유국들은 원유를 무기로 삼았다. 전쟁 전에 배럴당 2달러60센트였던 중동산 원유의 가격이 4개월 만에 11달러65센트로 뛰며 세계는 1차 석유 위기에 빠져 들어갔다. 1979년에는 이란 이슬람 혁명의 여파로 2차 석유 위기를 겪었다.

두 차례 석유 파동 속에서 석유회사들은 살아남았다. 이익반분협정(1950년) 이전까지는 순수익의 80%를 가져가던 석유 메이저는 황금알을 낳은 거위를 읽은 꼴이었으나 수익은 줄지 않았다. 유가 인상분을 소비가격에 반영해 오히려 인상분만큼 돈을 벌었다. 테헤란 협정 49주년. 세상은 많이 변하고 유가도 춤췄건만 변하지 않은 게 딱 하나 있다. 세계 에너지 수급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은 오히려 커져만 간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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