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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1981년 이란 위기 종식

미국 인질 444일 만에 석방

[오늘의 경제소사] 1981년 이란 위기 종식
1981년 이란에서 풀려난 미국 외교관들이 미군 수송기 ‘프리덤원’에서 내리고 있다. /위키피디아

1981년 1월20일 오후5시20분(GMT·그리니치 표준시 기준) 이란 테헤란시. 알제리가 특별편성한 여객기 두 대가 메라바드국제공항을 이륙했다. 탑승자들은 더러 눈물을 흘렸다. 인질로 억류된 지 444일 만의 자유였기 때문이다. 알제리를 거쳐 미군 수송기로 갈아타고 당시 서독 프랑크푸르트 부근 라인마인 미 공군기지에 도착했을 때 미국 전체가 그들을 반겼다. 막 취임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각별한 의전을 지시하고 권좌를 내준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인질을 영접하기 위해 서독을 찾았다.

대사관을 습격하는 ‘야만적’ 사태가 발생한 시기는 1979년 11월 초. 이란 회교혁명(1979년 1월)으로 쫓겨난 팔레비 전 국왕의 거취가 화를 불렀다. 26년에 걸친 재위기간 중 350억달러를 빼돌리고 5만여명을 죽였다는 혐의로 이란의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팔레비의 입국 신청을 미국은 덥석 받아들였다. 이란의 과격파 학생시위대는 미국대사관에 난입해 외교관 70여명을 인질로 잡았다. 요구조건은 팔레비의 송환. 이란의 실력자 호메이니는 일부 외교관을 석방하면서도 학생들의 정당한 요구를 막을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미국과 이란의 관계는 이후 악화 일로를 걸었다. 회교혁명 발발 이후 이란은 미국에 대한 비난을 자제하고 미국은 이란에 대한 무기 부품 수출을 계속하는 등 관계를 지속하려는 노력 대신 상호 비방으로 들어섰다. 미국은 왜 암으로 시한부 생명인 팔레비의 입국을 허용했을까. 샤 팔레비에 대한 의리와 인도주의, 중동 국가를 깔보는 오리엔탈리즘, 독재자를 옹호하는 습성 등 온갖 해석이 있다. 분명한 것은 인질 사태의 장기화. 미국 여론도 나빠졌지만 이란의 정서에는 반미가 깔려 있었다. 석유 국유화를 추진하던 모사데크 정권을 1953년 쿠데타로 내쫓고 팔레비를 앉힌 게 미국이기 때문이다.

인질 사태는 미국 정치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구출작전 실패로 지지도가 급락한 카터는 재선에서 패배하고 레이건이 등장해 보수화로 치달았다. 이란도 새 대통령과는 척을 지고 싶지 않았던지 인질을 풀어줬다. 임기 만료를 앞둔 카터가 이란과의 협상에서 압류자산 동결 해제를 카드로 활용한다는 비난이 일자 레이건 당선자는 ‘인질 석방과 관련한 어떤 거래도 지지한다’며 힘을 보태줬다. 미국과 이란의 갈등은 옛날 얘기가 아니다. 외교관에 대한 공격이나 제3국을 방문한 군 고위관계자를 드론으로 죽이는 것에는 ‘야만적 행위’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성과 금도가 사라진 세상에는 증오만 남을 뿐이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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