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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의 음악으로 듣는 여행] 세상과 갈라놓은 붉은 담장...세기말, 탐미주의의 무덤이 되다

<영국 잉글랜드 '레딩 감옥'>

英 탐미주의 작가로 잘나가던 와일드

동성애에 빠져 2년간 레딩 감옥 수감

중노동으로 참혹한 하루하루 보내며

쾌락 그리고 아름다움과 영원한 이별

출소 이후 쓴 '레딩 감옥의 발라드'는

작곡가 이베르 통해 교향시로 재탄생

영국의 유명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수감생활을 했던 레딩 감옥의 모습. /사진제공=진회숙씨




영국의 유명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수감생활을 했던 레딩 감옥의 모습. /사진제공=진회숙씨




영국 잉글랜드 남부 버크셔 주에 있는 레딩(Reading)에는 아주 유명한 감옥이 있다. 영국의 유명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수감생활을 했던 레딩 감옥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1854년 10월 16일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유명한 의사이자 고고학자였던 아버지와, 시인이자 아일랜드 민족주의자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9살 때까지 집에서 가정교육을 받다가 포토라 왕립학교를 거쳐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과 옥스퍼드의 모들린 대학에서 공부했다. 와일드의 대학 생활, 그 중에서도 특히 옥스퍼드에서의 4년은 그의 지적 성장에 매우 중요했던 시기로 꼽힌다. 이때 고전문학과 인문학에 폭넓은 교양을 쌓았는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그리스 철학은 물론 스피노자, 괴테, 헤겔, 르낭, 보들레르의 작품에도 통달했다. 문학적으로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해 <라벤나 Ravenna>라는 시편으로 뉴디기트 상을 받기도 했다.

와일드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옥스퍼드에서는 존 러스킨과 윌터 페이터 교수를 중심으로 탐미주의 운동이 펼쳐지고 있었다. 탐미주의란 예술의 미학적 기준을 도덕성이나 실용성에 두지 않고, 오로지 아름다움에만 두는 것을 말한다. 탐미주의자들은 예술이 오로지 아름다움 자체를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는데, 시인 앨져논 스윈버언, 화가 휘슬리도 이 운동에 동참했다.

와일드 역시 이에 매료되었다. 대학 시절부터 그는 소문난 탐미주의자였다. 이런 그의 성향은 차림새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그의 사진을 보면, 그가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옷차림에 신경을 썼는지 알 수 있다. 벨벳 재킷, 모피 코트, 비단 스타킹, 비로드 바지, 해바라기나 깃털 장식, 네로 스타일의 긴 머리 등. 당시에는 분명히 ‘튀는’ 복장이었을 그의 차림새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으로 “나는 탐미주의자입니다”를 외치고 있다.

와일드의 독특한 차림새는 곧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게다가 그는 입담도 아주 좋았다. 풍부한 지식과 교양, 달변과 유머로 탐미주의의 아이콘으로 등극했다.

1884년 5월, 와일드는 부유한 왕실 변호사의 딸 콘스탄스 로이드와 결혼하고 첼시에 살림을 차렸다. 1885년과 1886년 장남 시릴과 차남 비비안이 잇달아 태어났다. 그 후 와일드는 직장을 지키고 틈틈이 창작에 매진하는 평범한 가장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1886년부터 2년간 <여성세계>지의 편집장을 지내면서 대표적 단편 <아아더 새빌 경의 범죄>와 <캔터베리관의 유령>을 썼다. 1888년에는 동화집 <행복한 왕자>, 1889년에는 <허언의 쇠퇴>와 , 1891년 장편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발표했다.

오스카 와일드의 생애를 볼 때, 작가로서 그의 전성기는 1891년이라고 할 수 있다. 그해 4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5월에 논문집 <의도>, 7월에 단편집 <아더 새빌경의 범죄>, 11월에 동화집 <석류의 집>이 출간되었고, 12월에는 파리에서 <살로메>를 탈고하는 등 문학적으로 풍성한 결실을 거둔 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와일드는 알고 있었을까. 작가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리던 바로 그 때, 후에 자신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을 불행의 씨앗이 싹트고 있었다는 것을. 그 씨앗은 알프레드 더글라스와의 만남이었다. 더글라스는 퀸즈베리 후작의 아들로 와일드보다 열 여섯 살이나 어렸다. 당시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빼어난 외모와 약간의 문학적 재능을 갖고 있었으나 폭력적인 아버지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 성격이 제멋대로였으며 사생활 또한 문란했다. 그런데 이런 두 사람이 서로에게 빠져 들었다. 와일드는 결혼해 자식까지 있는 몸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리스 조각을 닮은 더글라스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당시 와일드는 연극공연에 대한 로열티로 일주일에 100 파운드 씩 벌어들일 정도로 소위 ‘잘 나가는’ 극작가였다. 그는 이렇게 벌어들인 돈을 더글라스와 함께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데에 썼다. 두 사람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와일드는 굳이 이를 숨기려 하지 않았고, 더글라스는 한술 더 떠서 오스카 와일드의 첫 사랑이 바로 자신이라고 떠들고 다녔다. 하지만 향락은 오래 가지 않았다. 오스카 와일드는 동성애를 했다는 이유로 법정 최고형인 2년의 강제노역형에 처해졌다.

영국의 유명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수감생활을 했던 레딩 감옥의 모습. /사진제공=진회숙씨


누구에게나 감옥생활은 힘들고 불편한 법이다. 하지만 와일드는 보통사람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왜? 그는 예술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탐미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말끔하게 차려 입고, 화려한 테이블에서 우아한 만찬을 즐기던 그에게 감옥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당시 영국 감옥의 환경은 끔찍하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열악했다. 옥스퍼드 출신의 이 엘리트에게 감옥은 그야말로 ‘개와 돼지의 소굴’처럼 보였다. 여기서 그는 평소에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중노동에 시달렸다. 배고픔과 추위, 혼자 버려졌다는 외로움과 상실감, 노동의 육체적 고통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이 참혹한 상황을 어쩔 수 없이 견디며 매일같이 죽음을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는지도 모른다.

1897년 5월, 와일드는 형기를 모두 채우고 출소했다. 그리고 이듬해 자신의 수인번호 ‘C. 3. 3.’로 <레딩 감옥의 발라드>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수감 생활을 하는 동안 아내를 죽인 혐의를 받은 한 남자가 공개적으로 교수형을 당하는 것을 보고 쓴 이 작품은 그 동안 생의 쾌락과 아름다움을 찬미하던 와일드가 더 이상 탐미주의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냉혹하게 보여준다.

고통에 빠진 이들과 함께 원을 그리며

그와 다른 줄에서 걷던



나는 궁금해졌네. 그 남자가 저지른 죄가

큰 것일까 작은 것일까

그때 내 뒷사람이 나지막이 속삭이는 말,

“저 친구, 교수형당할 거라오.”

다만 그가 어떤 생각에 쫓겨 발걸음이

빨라졌는지, 그리고 어째서

눈부신 하늘을 향해 그토록 애틋한 눈빛을

보냈는지, 나는 알았네.

그 남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죽였고

그래서 죽어야 하는 것이라네.

아내를 죽인 남자뿐만 아니라 탐미주의자 오스카 와일드도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죽였고, 그래서 죽어야 하는 것”이었다. <레딩 감옥의 발라드>는 오스카 와일드가 출소 후에 쓴 유일한 작품이자 마지막 작품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수감생활을 했던 레딩은 런던에서 차를 타고 서쪽으로 한 시간 정도 가면 나온다. 레딩은 아주 한적하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번잡한 런던과 달리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하기야 오스카 와일드의 삶에 대해 특별히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영국에 이런 도시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 역시 오스카 와일드의 <레딩 감옥의 발라드>라는 작품을 접하고나서 레딩이라는 곳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감옥은 붉은 벽돌 담장에 둘러싸여 있었다. 담장은 견고하고 높았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 보니 지금 이 감옥은 폐쇄되어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건물 옆에 지금은 폐허가 된 레딩 사원의 잔해가 남아 있었다. 사원의 무너진 담장 사이로 멀리 레딩 감옥의 모습이 보였다. 하늘은 말할 수 없이 푸르고, 근처의 성 제임스 교회에서 울려오는 종소리는 더 없이 평화로웠다. 오스카 와일드도 저 종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무심하게 평화로운 종소리를 들으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레딩 감옥의 발라드> 이후 와일드는 더 이상 아무 작품도 쓰지 못했다. 참담한 수감생활이 작가로서 그의 창조적 에너지를 앗아간 것이다. 그 후 약 3년 동안, 와일드는 파리의 하숙집에서 몇몇 가까운 친구들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했다. 이 무렵 그는 “나는 절대로 이 세기를 넘기지 못할 것 같아.”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오스카 와일드는 20세기를 한 달 앞둔 1900년 11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지난 1920년, <레딩 감옥의 발라드>는 프랑스 작곡가 자크 이베르(1890-1962)에 의해 교향시로 재탄생했다. 자크 이베르는 오네게르, 미요와 함께 현대 프랑스 악단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곡가이다. 작품 수가 그렇게 많지 않은 과작의 작곡가에 속하는데, 오묘한 구성력과 풍부한 오케스트레이션, 다채로운 리듬을 바탕으로 세련되고 신선한 음악을 작곡했다. <레딩 감옥의 발라드>도 그런 작품 중 하나이다. 레딩 감옥에는 분명 광기와 공포가 만연했겠지만 이베르의 음악에는 별로 그런 면이 보이지 않는다. 그 광기와 공포를 프랑스적 에스프리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이베르 역시 오스카 와일드 못지 않은 탐미주의자였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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