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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놀의 경제소사] 영국을 되살린 저지섬 전투

1781년 15분만에 彿군 제압



[오놀의 경제소사] 영국을 되살린 저지섬 전투
피어슨 소령의 죽음.

1781년 1월 6일 새벽 1시 30분, 영국령 저지 섬 해안. 프랑스군 선발대가 발을 붙였다. 감시초소와 해안포대를 바로 점령했으나 크고 작은 사고로 오전 4시까지 상륙한 병력은 약 700여명. 전체의 반도 못 내렸다. 일부러 산길을 피해 진격한 프랑스군은 아침 7시 무렵 섬의 중심지인 세인트 헬리어까지 들어갔다. 영국 부총독 코벳을 생포한 프랑스군은 허풍을 쳤다. 병력 4,000여명이 상륙했고 1만명이 더 들어오니 항복하라고. 프랑스군은 모든 군사시설을 양도하고 섬 수비대의 소화기와 탄약을 가져오라는 항복조건을 다그쳤다.

부총독이 시간을 끄는 동안 영국군 수비대가 속속 모여들었다. 당시 저지 섬의 영국군 병력은 2,500여명. 작은 섬치고는 많았다.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륙을 시도하던 프랑스군 5,000여명을 19개월 전에 운 좋게 막아낸 뒤 영국은 섬 주민들로 5개 민병연대를 편성하고 해안포를 깔았다. 보초가 근무지를 이탈하는 통에 프랑스군의 상륙을 허용하고 섬의 수도가 점령됐지만 내 가족과 집을 지키려는 민병들의 의지가 강했다. 부총독은 부하들에게 항복하라고 명령했으나 젊은 장교들은 듣지 않고 프랑스군과 싸웠다.

전투는 싱겁게 끝났다. 선임자들이 크리스마스 휴가를 떠나 지휘를 맡았던 피어슨 소령과 영국군은 전투 개시 15분 만에 승부를 결정지었다. 24살의 피어슨 소령이 가장 앞에서 돌격하다 총 맞아 죽었어도 전열을 유지하는 영국군을 보고 프랑스군은 포로로 잡았던 부총독에게 항복하며 선처를 구했다. 영국군은 16명이 죽고 65명이 다친 반면 프랑스군은 86명이 전사하고 72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포로는 456명이나 잡혔다. 규모가 적고 시간도 짧았지만 저지 섬 전투는 영국 근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북미 식민지에서 영국군이 연패하며 신생 미국의 탄생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영국인들은 젊은 장교가 용감하게 죽어가며 나라를 지켰다는 사실에 감동 받았다. 시인은 피어슨 소령을 찬미하고 화가는 붓을 들어 장엄한 순간을 알렸다. 독립전쟁에서 영국이 막대한 전비와 인명을 잃고도 5대양을 호령하는 대영제국으로 발돋움한 데에는 젊은 장병들의 기개가 서려 있다. 프랑스에 훨씬 가깝지만 건지 섬과 더불어 11세기 중반부터 영국 본토로 간주돼 온 저지 섬의 현재 인구는 약 10만명. 1인당 소득이 6만 달러로 본토보다 훨씬 많아서인지 인구 밀도가 높다. 돈벌이의 주요 수단은 검은 돈이다. 깨끗하지 못한 돈의 세탁장소로 유명하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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