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종목 시세보기

서울경제

HOME  >  오피니언  >  기획·연재

[오늘의 경제소사] 왜로 흘러간 조선의 첨단기술

은 제련법 일본 유출

[오늘의 경제소사] 왜로 흘러간 조선의 첨단기술
은을 체취하는 과정의 모습. /일본 이와미 은광 홈페이지

1539년 8월19일 중종이 전주 판관 유서종의 죄상을 국문으로 밝혀내라는 어명을 내렸다. 죄목은 ‘쇠를 불려 은을 만든 일’. 조선의 첨단 은 제련법인 ‘회취법(灰吹法)’을 사사롭게 이용해 일본산 은광석을 정련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왜인이 같이 있었다는 점. 조선의 은 제련법이 이 시기를 전후해 일본에 유출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은 제련 기술의 유출설은 국내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퍼지는 학설. 다수 일본 학자들은 부인하지만 한 가지만큼 확실하다. 이와미(石見) 광산을 비롯한 일본 주요 광산의 은 생산이 1530년대 중반 이후 급격하게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무관 출신이며 김해에 집을 갖고 의주와 전주 판관을 지낸 유서종은 적지 않게 말썽을 일으킨 인물로 추정된다. 종 5품 벼슬이면서도 중종실록에 관련 기사가 여섯 차례나 나온다. 한결같이 좋지 않은 내용이다. 가문 전체가 부정에 연루돼 1537년부터 파직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고 중종은 그때마다 윤허했다. 하지만 어쩐 영문인지 그는 기술 유출죄를 저지른 2년 뒤에도 살아남아 실록에 이름을 올렸다. 전옥서 주부(종 6품)로 내려앉은 그는 ‘도저히 조정의 반열에 둘 수 없으니 파직하라’는 비판을 받았다. 왕이 그대로 따랐다고 하지만 그 이후는 알 수 없다. 2년 3개월 전에도 죽을죄로 지목받았지만 살아남았으니까.

일본산 은은 동양은 물론 세계사의 흐름도 바꾸었다. 일본은 16~17세기 무렵 전 세계 은의 3분의1을 생산하는 나라로 떠올랐다. 마침 두 가지 변화가 은의 가치를 귀하게 만들었다. 명나라가 15세기 중반 이후 세금의 은납화를 추진했으며 유럽인들이 주도하는 대항해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은은 16~17세기 국제무역을 위한 결제통화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스페인은 포토시 광산에서 막대한 은을 생산했으나 태평양을 건너기보다 일본에서 은을 구해 중국에서 8대1에서 6대1의 교환 비율로 금과 바꿔 유럽에 돌아오면 막대한 차익을 얻을 수 있었다. 유럽에서 금과 은의 교환비는 14대1에서 16대1을 오갔다.

국제무역이 자리 잡기 이전부터 조선은 왜은에 녹아났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군사력이 일본의 은 광산에서 나왔다. 은뿐 아니다. 인삼과 도자기 기술도 유출 또는 약탈로 왜에 흘러들어가 조선의 대왜무역 흑자 기조가 무너졌다. 기술유출은 일본의 집요한 노력도 있었지만 고비마다 왜를 도운 조선인들이 있었다. 왜에 붙어먹었던 못나고 못된 조상과 우리는 얼마나 다른지 모르겠다. 친일을 대놓고 드러내는 세상이라니.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XC
이 기사를 공유하세요.

이메일 보내기

보내는 사람

수신 메일 주소

※ 여러명에게 보낼 경우 ‘,’로 구분하세요

메일 제목

전송 취소

메일이 정상적으로 발송되었습니다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