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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철수칼럼] 이념정치와 현실정치

동북아 안보지형 급변하는데
이념치우친 정책에 국제왕따
北核·미세먼지 등 헛바퀴만
국제정치무대서 생존하려면
현실적 수단 갖춘 정책 필요

[오철수칼럼] 이념정치와 현실정치
오철수 논설실장

1494년 8월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자 도시국가 피렌체는 혼란에 빠졌다. 상업활동 덕분에 경제적으로는 번성했지만 자체 군대를 보유하지 않았던 피렌체는 프랑스군을 막아낼 힘이 없었다. 피렌체는 부랴부랴 협상단을 보냈다. 이때 사절단을 이끌었던 사람이 수도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다. 그는 감동적인 연설로 샤를 8세의 마음을 움직였다. 덕분에 약탈을 피할 수 있게 되면서 사보나롤라는 피렌체의 실세로 떠올랐다. 그런데 뜻밖의 문제가 생겼다. 권력자가 된 사보나롤라가 피렌체의 부정부패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교황까지 비판하자 교황청이 발끈한 것이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사보나롤라를 로마로 보내지 않으면 피렌체 시민 재산에 타격을 입힐 것”이라고 압박했다. 겁을 먹은 피렌체 시민들은 사보나롤라를 화형에 처해버렸다. 피렌체를 구한 영웅으로 떠올랐던 사보나롤라는 왜 4년 만에 이 같은 비극적 상황을 맞았을까. 이에 대한 답을 준 이가 니콜로 마키아벨리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무장을 한 예언자는 성공하지만 말뿐인 예언자는 실패한다”고 결론지었다. 현실적인 수단을 갖추지 못한 이상적 정치가는 몰락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지킬 군대도 없이 교황을 공격했으니 사보나롤라의 몰락은 예고됐던 셈이다.

사보나롤라의 사례는 지금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 우리나라의 외교·안보정책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미국과 일본·중국 등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그 어떤 나라와도 관계가 원만하지 않다. 동맹국인 미국만 해도 그렇다. 한미 양국은 북한 비핵화와 주한미군 방위비, 인도태평양 전략 등 현안마다 부딪치지 않는 것이 없다. 가장 큰 당면과제인 북한 핵 문제만 해도 우리 정부는 남북협력을 매개로 북미 협상을 촉진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지만 미국의 입장은 다르다.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FFVD)가 없으면 제재완화도 어렵다는 것이다. 북미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북한도 우리 정부에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북핵 중재에 나섰다가 양쪽 모두로부터 외면을 받고 있는 셈이다.

사정은 다른 주변국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해 긴밀한 협조를 해야 할 우방국 일본과는 국교수립 이후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다. 위안부협정 파기 문제로 틀어지기 시작한 한일관계는 해상초계기 갈등에 이어 강제징용 배상 판결까지 겹치면서 회복이 불가능한 국면이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경제보복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이를 보면 양국이 과연 우방국이 맞나 싶을 정도다. 중국과도 대북제재와 미세먼지 등 현안이 산적해 있지만 협력은 원만하지 못하다.

국제무대에서 우리 외교가 왕따 신세를 면하지 못하는 것은 이념에 치우친 비현실적인 정책 탓이 크다. 북핵 문제만 하더라도 문재인 대통령은 한반도의 운명을 우리 손으로 결정하겠다며 한반도 운전자론을 외교정책 방향으로 내세웠지만 중재는 고사하고 욕만 먹고 있다. 운명을 남의 손에 맡기지 않는다는 것은 듣기에는 그럴싸하지만 현실적 수단이 없으면 공염불일 뿐이다. 지금 국제정치에서 우리 손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가. 좋든 싫든 지금 현실에서 미국의 도움 없이는 어떤 난제도 풀 수가 없다. 핵도 그렇고 종전선언과 평화협정도 그렇다. 결국 우리 민족끼리 좋은 관계를 통해 남북관계를 풀어보자는 것은 순진하기 짝이 없는 정책이다.

마키아벨리는 불확실성의 연속인 국제정치 무대에서 국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운명을 넘어설 수 있는 역량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성 있는 정책 수단이다. 이것 없이 막연한 이념에 이끌리는 정책은 나라를 위태롭게 할 뿐이다. 특히 국가의 생사를 좌우하는 안보정책은 더군다나 현실성이 있어야 한다. 오는 11일 미국에서 한미정상회담이 열린다. 이번 회담에서 문 대통령은 교착상태에 빠진 북핵 협상의 돌파구를 열어야 한다. 그 열쇠는 현실에 바탕을 둔 정책이다. 북한 비핵화를 놓고 가뜩이나 한미 간 이견이 큰 상태에서 우리 정부가 실현 가능성도 없는 한반도 운전자론을 고집한다면 한미동맹의 틈만 더 벌어지게 할 뿐이다. /csoh@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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