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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前 대통령 별세] YS·JP와 역사적 3당합당…'통합의 정치 유산' 만들어

■통합의 정치 유산

정적도 국정 파트너로 인정…원외 정당 민중당과도 영수회담

군부 독재 → 민주 국가로 전환되는 과정서 갈등의 진폭 좁혀

1989년 7월 10일 청와대에서 열린 영수 회담에서 노태우(오른쪽) 대통령과 김종필 공화당 총재가 악수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1990년 6월16일 노태우(오른쪽)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회담을 갖기 위해 도착한 김대중 평민당 총재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연합뉴스


1989년 6월 21일 청와대에서 노태우(오른쪽) 대통령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가 영수 회담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이 남긴 정치적 유산으로 ‘통합의 정치’가 꼽힌다. 노 전 대통령은 살아생전 끊임없이 대화와 타협을 통해 통합의 정치를 구현했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과 대통령 취임 이후 여소야대·여대야소 정국을 가리지 않고 상대의 얘기를 듣기 위해 힘을 쏟았다. 군부 세력에 대한 거부감이 큰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물론 진보 진영의 원외 정당인 민중당의 대표와도 영수 회담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조차도 그의 경청하려는 태도만큼은 매우 높게 평가했다. 노 전 대통령의 이 같은 통합의 정치가 우리나라가 군사 독재 국가에서 민주 국가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갈등의 진폭을 좁혔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일각에서는 그의 통합의 정치가 아니었다면 대립과 갈등이 더 오랜 기간 지속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후한 평가도 이어지고 있다.

그는 지난 1987년 대통령 직선제도와 5년 단임제 도입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9차 개헌이 이뤄지는 과정에서도 통합의 정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줬다. 그해 6월 항쟁으로 민주화 요구가 거세게 불어닥친 뒤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 대표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 도입을 비롯한 평화적인 정부 이양,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실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면 복권, 국민 대통합 등을 담은 6·29 선언을 발표했다. 군사 독재에 맞서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정부 시위에 따른 8개 항목의 시국 수습 방안이었다.

하지만 그 방안이 발표되기까지의 과정은 녹록하지 않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6월 항쟁 2개월 전인 4월 13일 선거인단을 통해 대통령을 선발하는 간선제를 유지한다는 내용의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열렸던 6월 10일부터 6·29선언이 발표되기 직전까지 정권은 강력 대응 기조를 유지했다. 이 과정에서 시위와 해산이 거듭됐고 일부 학교는 문을 닫았다.

코너에 몰린 전 전 대통령은 시국 수습책을 논의하기 위해 6월 24일 김영삼 전 대통령과 영수 회담을 했다. 이 회담은 ‘영수 회담밖에 답이 없다’는 노 전 대통령의 제안을 전 전 대통령이 받아들여 이뤄졌다는 게 중론이다. 이후 직선제 요구 수용이 전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이뤄졌는지, 아니면 노 전 대통령을 위주로 이뤄졌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주장이 엇갈린다. 하지만 적어도 노 전 대통령이 대화와 타협을 중시했다는 점만큼은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야당의 요구였든, 전 전 대통령의 권유였든 여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 전 대통령이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노 전 대통령의 통합의 정치는 1988년 2월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이어졌다. 취임 2개월 뒤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민정당은 국회 전체 의석(299석) 가운데 125석을 얻는 데 그쳤다. 김대중 총재의 평화민주당과 김영삼 총재의 통일민주당, 김종필 총재의 신민주공화당은 각각 70석, 59석, 35석을 차지했다. 여소야대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그 돌파구도 영수 회담에서 찾았다. 총선 이후 한 달이 지난 5월,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 김종필 총재를 청와대에서 마주했다. 영수 회담 테이블에는 노 전 대통령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울 수 있는 5·18 민주화 운동, 제5 공화국 비리 규명 등의 안건이 올랐다.

노 전 대통령은 이후에도 야당 총재를 국정 동반자로 인정하고 국가의 주요 현안에 대해 늘 상의했다. 야당 총재와 단둘이 만나는 2자 회담도 수시로 열었다. 1989년 3월에는 김대중 총재와도 만나 전 전 대통령과 고(故) 최규하 전 대통령 인책을 약속했다. 특히 이 회동에서는 노 전 대통령의 ‘중간 평가’ 공약 철회에 합의하기도 했다. 같은 해 6월에는 김영삼 총재에게 ‘정책 연합’을 제안했다. 12월에는 노 전 대통령과 김영삼·김대중·김종필 총재가 함께 모여 지방자치제 부활을 놓고 논의하기도 했다.

이뿐 아니다. 여소야대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으로 한국 정치사에 유례없는 거대 정당을 만들었다. 3당 합당은 한국 거대 보수 정당인 국민의힘의 뿌리가 됐고 정치적 야합의 과정에서 김영삼과 김대중, 그리고 노무현 3명의 대통령을 낳는 역사적 사건이 됐다. 김종필 총재와 내각제 개헌의 입을 맞춘 노 전 대통령은 제2 야당을 이끄는 김영삼 총재에게 합당을 제안했다. 김영삼 총재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가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3당 합당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합친 3당은 217석, 헌정사상 가장 거대한 보수 여당 ‘민주자유당’으로 탄생했다.

정치사의 획을 그은 3당 합당은 많은 거물을 낳았다. 김영삼은 호랑이를 잡았다. 민주계를 이끌고 민자당의 총재가 됐고 14대 대선에 나가 대통령이 됐다. 거물들은 승리 공식이 분열이 아닌 야합이라는 점도 깨달았다. 대선에서 지고 정계를 은퇴했다 돌아온 김대중은 15대 총선에서도 참패한다. 김대중은 약속한 내각제 개헌을 헌신짝처럼 버린 김영삼에 앙금이 있던 김종필에 손을 내민다. 그렇게 탄생한 ‘DJP연합’은 15대 대선에서 김대중을 대통령의 자리에 올렸다. 노무현 전 대통령(16대)도 결과적으로는 3당 합당이 낳았다.

1987년 12월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서울 여의도 유세장에서 환호하는 수많은 인파를 향해 두 손을 들어 답례하고 있다. /연합뉴스


1988년 2월 19일 민정당의 대통령 취임준비위팀이 조각 발표와 함께 사실상 해체되면서 노태우(앞) 차기 대통령과 삼청동 임시집무실 현관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최병렬(뒷줄 오른쪽부터)·김종인·김중위 의원, 이춘구 위원장, 강용식·이진·현홍주 의원.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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