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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에세이] 'D.P.(디피)'가 12년 전, 내 안의 괴물을 깨웠다

사진=넷플릭스




돌아보면 내게 군대는 생각보다 아름다운 기억으로만 남아있었다. 강원도 고성의 푸른 바다를 문 하나만 열면 언제든 볼 수 있었고, 동료들과 함께 벌인 웃긴 에피소드도 넘쳐났다. 술자리 소재로 무궁무진해 전역 후 10년이 흐른 지금도 아직 못한 이야기가 남아있다. 홀로 술을 홀짝거릴 때면 그때 그들을 떠올리면서 그리워하곤 한다. 그렇게 해가 바뀔수록 군대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추억이 되고 있었다. 이 드라마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안준호(정해인)가 자대배치 받은 이후부터 손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소대장 입장에서 가장 두려워했던 일들이 거침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정형편도 어려운데 몸도 아파 의병 전역하는 옆 소대 병사에게 지갑에 있는 현금을 전부 꺼내 차비 하라고 줬던 일이 불현 듯 떠올랐다. 1년여간 해안 GOP에서 근무하며 보고 듣고 겪었던 말할 수 없는 비위와 악폐습들이 머리에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로 인해 다친 병사도 있었다. 숨이 차고 앞이 깜깜해졌다. 불안하고 미안해져서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볼 수 없었다.

사진=넷플릭스


‘D.P.(디피)’는 원작 웹툰을 본 독자들이라면 아주 많이 기대했을 작품이다. D.P 뒤에 ‘개의 날’이라는 말을 붙일 만큼 군대를 냉소적으로 그렸다. 덕분에 감정이입 없이 관찰자의 시선으로 D.P.와 탈영병을 보게 만들었다. 내 부대 일도 아니고, 내가 겪었거나 겪을 일도 아니고, 간결한 화법의 전개는 다음엔 어떤 사연이 등장할까 궁금하게 만드는 정도였다.

5명의 탈영병을 놓고 6부작으로 압축된 드라마는 웹툰과 정 반대되는 특징을 앞세워 시청자를 단숨에 압도했다. 마치 실세 상병이 자대배치된지 며칠 안된 이등병을 대하듯, 유들유들 하다가 정말 왜 지금인지 모르는 타이밍에 도끼눈을 뜨고 달려든다. 극한 현실감. 원작에서 가장 있을법한 소재를 빼왔고, 부처라 불리던 사람이 불과 몇 개월 만에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을 정말 적나라하게 그렸다.

그때는 누구나 마음속에 괴물을 키웠다. 대학 시절 독실한 크리스천이던 선배가 간부 후보생 시절 악폐습을 묵인하던 것에 실망했던 감정은 순수했다. 방학마다 집체교육에서는 어느 학교가 더 선배들이 괴물같은지 경쟁했다. 그건 우스웠다. 임관 후 자대에 배치되고 나니 선배들의 압박은 매일같이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다. 소초에서 전화를 받을 때마다 십수번씩 죄송하다고 해야 끝나는 대화. 이미 당연시 된 문제들. 몇몇 문제는 드러나 달라졌다지만, 결국 몇몇 병사들은 A급, 혹은 FM으로 다듬어지는 궤도에서 이탈했다.

여기서만 나가면 뭐든 할 수 있겠다. 한겨울 백사장 끝에 세워진 조립식 건물 안에서 광대가 핑크빛으로 물든, 피곤을 넘어 눈이 풀려버린 병사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고작 이것 뿐이었다. 그리고 이 말은 그곳에서 철수했을 때도, 제2신교대 교관이었을 때도 똑같았다. 어떻게든 내 공포와 그들의 공포가 같지 않게 만들고 싶었다. 진심으로.

사진=넷플릭스




잊고 싶었던 기억을 되살린 ‘D.P.’를 군생활 판타지라고 부르고, 그렇게 믿고 싶다. 저마다 사연 없는 사람 없듯, 드라마에 등장한 탈영병 5명의 사연도 저마다 이유가 있다. 주인공을 제외한 헌병들은 그들을 냉소적으로 봤으나 그 사정을 이해한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은 변명이지만 진실이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면 누구든 안다.

사람을 못 때리겠어서 유도선수를 포기하고 미술학원 강사가 됐던 조석봉 일병(조현철)은 ‘특급전사는 어떻게 땄냐’는 박범구(김성균) 중사의 말에 “해야 되니까”라고 답한다. 그리고 박범구는 다시 말한다. “좋은데 너무 애쓰지 마라. 탈난다”

못이 튀어나온 벽에 밀치고, 관물대를 뒤져 편지를 읽고, 이유없이 얼차려를 주고, 방독면을 씌우고 물을 붓고, 얼굴에 살충제를 뿌리고, 대공포 발사쇼를 보자며 자위행위를 시키고…. 먼저 입대한 것이 계급이 되고, 계급의 무게까지 배우지 못한 이들이 괴물이 된다. 그리고 그 괴물은 평범했던 사람을 집어삼킨다. 물론 요즘 세상엔 휴대폰이 그 괴물 대부분을 물리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지만.

“우리가 바꿀 수도 있잖아”라는 한호열(구교환) 상병의 호소에 1953이 적힌 자신의 수통 생산연도를 말하는 조석봉.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며 뒤늦게 읍소하는 사건의 발단 황장수(신승호). 그리고 실탄으로 무장한 채 이들을 둘러싼 헌병대 특임대. 빨리 해결하고, 범위를 최소화하고, 책임을 몰아주고, 금세 잊히게 만드는 또다른 괴물은 정말 해결할 수 없는 걸까.

사진=넷플릭스


이제 일년에 한번 정도는 내가 걸으며 지켰던 바닷가를 찾는다. 늦은 밤 그 지긋지긋한 습기를 맛보며 짭짤하게 간이 잘 됐다고 하고, 머릿속에 각인된 일출을 보며 새삼 뭉클해한다. 책임감으로 포장했던 공포를 털어내고, 추억만 남은 봉포의 바다는 고요하고 아름답기만 하다. 경계근무가 끝나고 병사들이 모두 잠든 아침, 백사장 포진지 옆에 앉아서 맛스타 포도맛 원샷하고 담배 한 모금 내뿜으며 바라보던 그 모습 그대로.

마음 속 괴물을 모두 물리쳤다고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그때의 그 긴장과, 두려움과, 공포는 여전히 가슴 속 아주 깊은 곳에서 꿈틀대며 튀어나올 시기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그 괴물들을 억누르던 경험은 회사에서 직원으로 살아오는 동안 수많은 위기에서 내가 내 자신일 수 있도록 붙잡았다. 그때 그 시절의 내 동료들도 그렇길. 잘 버텨냈고, 잘 버텨내길. 부디….

사진=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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