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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에세이] '어른들은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대학생 시절 야학 교사를 하며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청소년을 몇 명 가르쳤다. 처음에는 마음을 다잡고 온 듯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몇 번을 전화해 달래고 화내면 한번씩 찾아오고는 했다. 그들에게 밥을 사주는 것은 쉬웠으나, 공부를 가르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한 학생이 자기는 꼭 대학에 가고 싶다며 어떻게든 공부를 해야겠다고 했다. 마침 방학이라 며칠간 낮에 불러 가르쳐보니 속도가 붙었다. 그리고 수업이 늘어날수록 그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기구한 인생사를 털어놨다. 누구에게도 쉽게 꺼낼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아린 마음으로 담담히 들어주기만 할 뿐,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었다. 해결해줄 능력도, 달래줄 자신도, 괜찮을 거라는 위로도 모두 위선처럼 느낄 것 같았다. 명색이 어른이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더 어른인 지금은 그들의 이야기가 관심에서 멀어졌다. 살아갈수록 나 하나도 챙기기 버거운 세상 아닌가.



‘어른들은 몰라요’에 등장하는 아이들과 갓 성인이 된 또다른 아이들의 이야기는 지금의 나처럼 ‘내 사정이 아니라’는 이들에게 할 말이 많다. 임신한 채 학교에서 내쳐진 아이, 4년째 거리를 떠도는 아이, 성인이 됐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채 그냥 먹고 살아야 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주변에 흩뿌려있지만 애써 외면하는 현실 아닌가. 작품은 문제작을 넘어 세상에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어른들은 왜 알면서 모르냐고.

이야기는 교장의 아들이자 교사인 상섭의 아이를 임신한 세진(이유미)의 시선을 따라간다. ‘모두가 자기 책임’이라는 각서에 싸인하고 ‘잘 사는게 이기는거야’라는 알 수 없는 말만 듣고 학교에서 내쳐진 세진. 거리를 떠돌다 만난 가출 4년차 동갑내기 주영(안희연)과 만나 함께 방황하기로 한다.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전자제품을 훔치고, 마사지로 임신중절을 해준다는 아저씨에 속아 위기에 처한 이들. 아직 준비되지 않은 아이들에게 생존이란 턱밑까지 치고 올라오는 압박이다. 체념한 듯 풀린 눈과 헛웃음, 흐물흐물한 몸짓은 위기에 위기를 부른다. 탐탁지는 않지만 그래도 믿을 만하기는 한 재필(이환)과 신지와 합류하면서 이들은 공동체를 구성한다. 결국 돈이 필요하니까 택한 길은 가장 쉬우면서 위험한 방법. 성인업소에서, 노래방에서 일하며 이들은 세진의 임신중절을 위해 푼돈을 모아간다. 그 와중에 신약 실험에 지원해 빼돌린 약을 먹어보기도 하고, 계단에서 굴러보기도 하지만, 생명이라는게 참 질기다. 그들의 하루하루처럼.

우여곡절 끝에 세진의 동생만 홀로 남아있던 집에 온 이들 일행 사이로 잠시 햇살이 비친다. 아주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난 듯, 세진은 동생 세정을 지친 눈으로 바라보며 말한다. “힘들어? 앞으론 더힘들어.”

다시 시작된 거리생활은 더욱 만만치 않다. 폭행, 그보다 더한 폭행, 목을 조여오는 위기, 이별, 그리고 폭행보다 무서운 위선과의 만남까지. 하루하루의 일기 내용이 다르듯, 이야기는 빠르게 전환되고 정신없이 흘러간다. 그리고 그만큼 충격적이다.





선을 넘어선 욕설과 무차별적인 폭력,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물의 선택은 이환 감독의 전작 ‘박화영’이 보여준 날것의 느낌 그대로다. 다만 다큐멘터리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왔던 하이퍼리얼리즘(극사실주의)에서는 살짝 벗어나 있다. 앞으로는 나아가지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스케이트보드의 움직임을 통해 작품은 연극의 막을 나누듯 에피소드를 끊어가며 등장인물의 관계 변화를 설명한다.

덕분에 ‘박화영’보다는 대중적인 영화에 가까워졌지만, 여전히 호불호가 나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특히 네명의 남녀가 서로 어울리게 된 계기, 빠른 관계변화는 자연스럽지 않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지적처럼 작품은 세세한 서사와 미묘한 감정변화에 연연하지 않는다. 최악의 상황에 최악의 선택을 하고, 더 최악의 상황에 빠져드는 이들의 폭주에 집중한다. 가정과 학교에서 통제를 배우지 못했던 이들이 세상이 정해놓은 선을 넘거나, 사랑에 대한 결핍을 함께 다니는 이들과 주변인들에게 풀어내는 모습은 현실보다 현실적이다. “니들 나 없으면 어쩔뻔봤냐”며 엄마를 자청하지만 끊임없이 배신당하는 박화영처럼, 이들의 관계도 앞을 내다볼 수 없다.

“우리도 살아야 되잖아요”라는 이들에게 ‘그래도 그건 아니지’라며 삿대질 할 수 있을까. 보기 불편한가. 그들을 이해해보려는 시도조차 해본 적 있는가.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을수록 그들의 이야기가 나와는 상관 없어져간다. 아니 모른척 하려고 한다. 작품은 끊임없이 ‘어른들은 모른다’는데, 뭔가 문제가 있긴 있구나 하는 생각만 하게 되더라도 메시지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2개월간의 워크샵을 거쳤다는 배우들의 집중력은 놀랍다. 연기를 해본적도 없고, 욕설도 자연스럽지 않았다던 안희연은 깜짝 놀랄 만큼 자연스럽게 날뛴다. 주인공 세진을 연기한 이유미 역시 짧게 등장한 ‘박화영’에서의 본인 연기를 넘어서며 살떨리는 전개를 이끈다. 워크샵에서 이들의 연기 훈련을 지도한 이환 감독이 직접 재필을 연기한 것이 배우들이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주는데 큰 힘이 됐다.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 뒤, 그 당시 가르쳤던 학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전문대 졸업을 앞두고 있다고, 앞으로 경찰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에게 ‘선생님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처음으로 잘 될거라고,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의 인생에 그 몇 번의 수업이 얼마나 영향을 미쳤겠냐만, 그 미약한 관심의 가치만큼은 이와 같은 영화를 볼 때마다 실감하고 또 실감한다.

/최상진 기자 csj8453@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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