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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인문학] 아기는 보통의 엄마를 '聖母'로 만든다

■사랑, 죽음 그리고 미학- 마리아 되기, 인간 되기

김동규 한국연구원 학술간사

끝없는 무력감과 나락에 떨어져도

아이 품으면 사랑 쥐어짜내게 돼

여자는 아이 낳고 기르면서 변신

민중은 예수가 되는건 불가능해도

마리아가 될순 있겠다는 희망있어

성상파괴 운동서도 마라아상 존속

예술가는 사랑으로 작품 잉태하고

창작함으로써 마리아 되고싶어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여기 한 남자와 여자가 있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한다. 그게 진정 사랑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체불명의 상처로 무정해진 여자에게 남자는 깊은 연민을 느낀다. 딱히 생의 목표도 없고 허무하기만 했기에 그는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것에, 그 결과 그녀가 사랑할 수 있게 하는 것에 남은 생 전부를 걸기로 한다. 한편 여자의 가냘픈 어깨에 놓인 삶의 짐은 무겁기만 했다. 의지할 수 없는 가족, 남성 중심 사회의 억압적 분위기, 불투명한 미래…. 그녀는 잠시라도 누군가에게 기대고만 싶다. 게다가 귀여운 아이들을 갖고 싶다. 그래서 둘은 결혼을 결정한다. 동서고금의 흔하디 흔한 남녀 이야기다.

오래지 않아 둘은 크게 오판했음을 깨닫는다. 남자는 여자를 돌볼 능력이 없었다.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에도 역부족이다. 그의 연민은 한갓 주제넘은 교만이었다. 여자도 마찬가지다. 남자에게 기대고픈 욕망의 대가가 예상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금세 확인한다. 더욱이 아이를 돌볼 실질적인 역량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도 확인한다. 무력한 자기 모습을 확인하면서 안 그래도 추락한 자존감이 한없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과거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가 품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들은 ‘아이 때문에’ 그럭저럭 사는 평범한 부부가 되고 만다. 그런데 남자는 놀라운 일을 발견한다. 여자가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놀라운 변신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무력한 아이가 여자를 어느덧 ‘성모’로 변신시켰다. 남자가 하고자 했으나 할 수 없었던 일을 꼬맹이가 간단히 해치운 것이다.

일신교 문화 전통에서는 주기적으로 성상 파괴 운동이 일어났다. 절대자라면 일체의 이미지를 초월한 존재라고 여겨지기에, 성상은 끝내 우상(偶像)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가톨릭 교회에서는 예수 이외에 마리아상을 허용해왔다. 통상 민중들이 본능적으로 어머니의 품을 갈구해서 포교의 방법으로 마리아상을 인정했다고 해석한다. 설득력 있는 해석이지만 강박적으로 우상을 기피하는 일신교 문화에서 그렇게나 많은 마리아상이 존재하는 까닭을 설명하기에는 조금 부족해 보인다. 일본의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는 ‘야전과 영원’에서 그 부족분을 채워주고 있다.

사사키 아타루


“신비주의자는 마리아를 반복하려 했던 것이다. 출산되는 것, 그것은 연애편지다. 사랑의 문자, 사랑의 징표다. 그렇다. 예수는 육화한 ‘말씀’이다. 그리고 ‘개념(concept)’은 원래 ‘수태한 것, 잉태한 것(conceptus)’이라는 뜻이고, ‘마리아의 임신’은 conceptio Mariae다. … 들뢰즈가 ‘글쓰기’와 ‘여자-되기’의 연관을 강조하면서 … 철학이란 개념의 창조라고 정의한 후에, ‘나 또한 여러 철학자와 교접함으로써 기이한 아이들을 계속 만들어 왔다’고 한 것은 바로 이 점을 말하는 것이다.”

당연히 인간은 신이 아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려고 십자가를 짊어졌던 예수도 아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거기에 도달하기란 어림없는 일이다. 더욱이 대다수는 그런 존재에 관심마저 없다. 그렇다면 인간이 겨우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경지는 마리아처럼 되는 것이다. 사랑을 낳음으로써, 인간은 사랑의 무한한 행렬에 동참할 수 있다. 인간 스스로는 결코 지고의 존재가 되지 못하지만 그런 존재를 낳을 수는 있다. 여자는 철저히 무력한 아이를 보며 그 애틋함에 어쩔 수 없이 사랑을 쥐어 짜낸다. 고갈된 젖가슴을 움켜쥐고 한 방울의 젖이라도 아이의 입에 넣어주려 한다. 미켈란젤로가 창작한 피에타(Pieta)는 비탄이란 뜻이자, 연민(pity)의 어원이 되는 단어이다. 그 작품은 죽은 자식을 부둥켜안은 마리아의 비탄이자 동시에 인간을 존엄하게 하는 깊은 연민을 그렸다.



남녀만 사랑의 결실을 낳는 건 아니다. 사랑으로 철학자는 개념을 낳고 예술가는 작품을 낳는다. 창작함으로써 모두 마리아가 되려 한다. 역사에 남은 플라톤이나 칸트, 셰익스피어나 피카소 같은 유명인은 극소수다. 대부분은 잊힌다. 역사의 행간에 숨어 있는 무명씨들도 이전 작품과 접촉하여 새로운(대개 볼품없는) 것을 잉태한 자들이다. 하지만 이름 없는 이 작품들이 없었더라면 기억될 만한 대작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인간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며, 부단히 생명을 이어가는 창작만 허락된 상황에서, 켜켜이 쌓인 창작의 퇴적물들이 대작의 비옥한 토양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종교는 신과의 대비 속에서 인간의 존재 위상을 잡아준다. 몇몇 기독교인은 인간 위상의 극대치를 마리아로 잡았고 그것을 마리아상으로 공포했다. 무지렁이 민중들도 자신이 예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해도 마리아가 될 수는 있겠다는 희망을 품었을 것이다. 그래서 성상 파괴의 회오리에서도 마리아상이 존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

김동규 한국연구원 학술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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