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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도망친 여자' 특별하진 않아도 묘하게 훔쳐보게 되는 힘

/사진=전원사 제공




누군가에게는 시시콜콜한 일상적인 이야기일 것이다. 잔잔한 호수 속에서도 일렁이는 물결을 발견해내는 홍상수 감독의 힘이 돋보인다. ‘도망친 여자’는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마치 나의 삶을 엿보는 듯한 영화다.

홍 감독의 스물네 번째 장편이자 연인 김민희와 함께 한 일곱 번째 작품인 ‘도망친 여자’는 그의 지난 영화들처럼 해외에서 일찌감치 인정받았다. 제70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감독상)을 수상했고, 부쿠레슈티 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았다. 스페인 산세바스티안 영화제의 경쟁 부문에도 초청받아 추가 수상을 노리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일반 관객에게 철저하게 외면받았던 홍 감독. ‘도망친 여자’로 이번에는 관객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

주인공 감희(김민희)는 결혼 후 5년 동안 남편과 한 번도 떨어져 지낸 적이 없다. 그런 남편이 출장을 간 사이 감희는 세 명의 친구를 만난다. 영순(서영화)과 수영(송선미)의 집을 방문하고, 우진(김새벽)은 혼자 독립 영화관을 방문했다 우연히 만나게 된다.

최근 이혼을 한 영화는 룸메이트와 함께 살고 있다. 그는 “술 마시면 얼굴이 너무 빨개져서 원래 술을 잘 안마시거든”이라고 말하지만 오랜만에 본 감희와 술과 고기를 나눠 먹으며 하루를 같이 보낸다. 수영(송선미)은 예술가들이 많이 산다는 동네에 새로 이사와 살고 있다. “재미있게 살고 싶다”는 그의 말처럼 그는 예술가들이 모인다는 술집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드는 데 재미를 붙였다. 필라테스 선생을 해서 “10억 넘게 모아놨다”며 자랑한다. 우진(김새벽)은 우연히 만난 감희에게 과거의 잘못을 사과한다. 사과할 기회가 오기를 너무나 오래 기다렸단다. 감희의 옛 연인이자 자신의 남편인 성규(권해효)가 가식적이라며 꼴 보기 싫다고 흉을 보기도 한다.

세 친구를 만나는 과정에서 감희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듣기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만나는 친구에게 마다 반복하는 말이 있다. “이번 출장 빼고는 하루도 남편과 떨어져 있던 적 없다”, “남편이 그러더라고. 사랑하는 사람은 무조건 붙어있어야 한다고.” 이 말을 하는 감희는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르겠다. 이것저것 음식도 잘 먹는데 무언가 공허한 마음에 배라도 채우려는 여자의 모습인 것만 같다. 현재의 삶을 벗어나 도망치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사진=전원사 제공




반면 감희의 세 친구는 당당하고 주체적인 모습이다. 영순은 길고양이를 도둑고양이라 부르고, 밥도 주지 말라는 옆집 남자에게 “법에 위배되지 않는 한 계속 (밥을) 주겠다”고 말한다. 수영에게는 술집에서 만나 하룻밤을 같이 보낸 젊은 시인이 골칫덩이다. 수시로 찾아와 “왜 수치심을 주냐”고 징징대고, 수영은 매섭게 내쫓는다.

감희는 이런 친구들에게 “부럽다”, “좋겠다”는 말을 늘어놓는다. 공기가 좋은 곳에 사는 것, 유명 건축가가 지은 집에 살아서, 젊은 남자에게 구애를 받아서 좋겠다고는 하지만 감희가 진짜 부러워하는 건 이들의 자유인 듯 하다.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간 도망쳐왔던 진심을 마주하고, 자신의 삶을 반추하기 시작한다.

홍상수 감독의 전작들처럼 영화는 날것 그 자체다. 뜬금없고 갑작스럽다. 예기치 않은 카메라의 줌인과 줌아웃, 사람이 아닌 동물을 피사체로 초점을 맞추고, 편집점 없이 이어지는 롱테이크. 마치 뚝뚝 썰린 나무토막을 그대로 이어붙인 느낌이다. 짜여진 대본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상황에 던져놓은 듯한 자연스러운 대사들과 연기를 하는 것 같지 않은 배우들의 연기는 영화와 현실 세계를 헷갈리게 만든다.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에 묘하게 몰입되며, 홍 감독 특유의 위트에 녹아들어 자신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게 된다.

담담하게 흘러가는 여자들의 대화를 엿듣다 보면, 나 자신을 관찰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의미가 없는 것 같은 일상의 이야기들도 곱씹다 보면 어느 순간 의미가 생긴다. 보편적인 대화들로 관객들에게 은근히 침투하는 홍 감독의 저력일 것이다. 17일 개봉.

/이혜리기자 hyer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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