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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노르망디의 탄생

911년 샤르트르 전투

프랑스 팔레즈 지역에 서 있는 흐롤프 동상. /위키피디아




911년 7월20일 프랑크 왕국 파리 남서부 샤르트르. 흐롤프가 이끄는 바이킹 집단이 쳐들어왔다. 바이킹은 자신감에 넘쳤다. 언제나 프랑크군을 압도해온 터. 흐롤프도 지략을 갖춘 리더로 유명했다. 배 700척에 분승한 4만여명 바이킹의 886년 파리 침공에서도 지휘관으로 용명을 떨쳤다. 루앙 지역을 20년 동안 지배하며 쌓은 경제력 덕분에 무장도 뛰어났다. 막상 전투가 벌어졌을 때 상황은 바이킹의 생각과 다르게 전개됐다. 샤르트르의 프랑크군은 완강하게 버텼다. 사제들까지 칼을 들었다. 주교가 지휘하는 프랑크군은 흐롤프를 패배 일보 직전까지 몰고 갔다.

샤르트르 공성작전이 실패로 끝나고 겨우 도망친 흐롤프의 바이킹 선단 앞에 더 큰 규모의 프랑크 군대가 나타났다. 프랑크 왕국의 국왕 샤를이 이끄는 정예 병력과 최후의 일전을 준비할 때 사절이 찾아왔다. 샤를은 실로 대담한 제안을 내놓았다. 떠돌아다니지 말고 아예 프랑크 왕국에 눌러앉으라는 것. 다만 세 가지 조건이 붙었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프랑크 국왕의 신하가 되어 다른 바이킹의 침략에서 프랑크를 방어하라는 제안이었다. 흐롤프는 이를 받아들였다.



바이킹으로 다른 바이킹을 막으려는 이이제이(以夷制夷)임을 뻔히 알고 있었으나 완전 포위된 상황에서 다른 대안이 없었다. 무릎을 꿇고 왕의 발에 입을 맞추라고 강요받았을 때 흐롤프는 부하를 내세웠다. 지목받은 바이킹 전사는 국왕의 발목을 잡고 번쩍 들어 올려 쓰러뜨린 다음 발에 입을 맞췄다. 국왕이 크게 웃으며 거래가 맺어졌다. 문서도 없이 입으로만 약속한 ‘생클레르쉬르엡트 조약’으로 바이킹은 프랑크 왕국으로 들어왔다. 국왕은 57세인 흐롤프에게 사생아 딸까지 내줬다. 국왕이 북쪽 사람들(노르만족)에게 하사한 땅에는 노르망디라는 새 이름이 붙었다.

프랑크 왕국의 전통적인 바이킹 대책은 매수. 예산의 30%가 들어간 적도 있다. 로마를 계승한 야만족 프랑크족이 새로운 야만족 노르만족을 돈과 땅으로 매입한 셈이다. 로베르라는 세례명을 받은 흐롤프는 국왕과 약속을 지켰다. 쿠데타가 발생하자 바이킹 함대를 끌고 파리로 진격해 국왕을 구출한 적도 있다. ‘롤로’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흐롤프는 유럽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직계는 6대에서 끊겼으나 방계는 무수히 많다. 영국을 침공해 국왕 자리에 오른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그의 6대손이다. 영국과 프랑스 간 100년 전쟁도 노르망디 영유권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직계는 아니지만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도 32대 후손이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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