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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인문학] 히틀러 충성한 獨문인 가르쳤던 부끄러운 국정교과서

■학교서 배우지 않은 문학이야기

-김진섭 번역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1936)

박진영 성균관대 교수·국어국문학

히틀러에 충성한 안톤 슈나크 수필

1948년 '생활인의 철학'서 소개후

국정 교과서 통해 수십년 가르쳐

시대배경 외면한 교육 부끄러울 뿐

김진섭




“울음 우는 아이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의 한편 구석에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가을의 햇빛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울음만이 아니고 죽음만이 아니다. 우리 곁에는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소소한 것들이 하도 많아 한 편의 글을 채우고도 남는다. 슬픔은 차례를 지켜서 오지 않으며 인과관계에 따라 생기지도 않는다. 가슴속 깊이 후벼 드는가 하면 불현듯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1950년대 고등국어 2에 실린 안톤 슈나크 원작, 김진섭 번역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어쩌면 영원히 이어질지도 모를 끝없는 슬픔의 목록을 꼭 한 단락 안에 담은 글이 있다. 시나 소설을 기웃거리지 않은 전문 수필가 김진섭의 솜씨요 오랫동안 한국인의 마음을 울린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다.

김진섭의 이름을 널리 알린 이 글은 식민지 시기인 1936년에 번역됐다가 해방 후에 펴낸 두 번째 수필집 첫머리를 장식했다. 김진섭은 첫 수필집 맨 앞과 맨 뒤에 독일시를 번역해 실은 바 있는데, 두 번째 수필집 ‘생활인의 철학’을 위해 각별히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골랐다. 김진섭은 그만큼 독일문학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넘쳤다.

김진섭의 두번째 수필집 ‘생활인의 철학’(1948)


김진섭은 일본에서 유학한 우리나라 제1세대 독일문학 전공자다. 대학 시절에 결성한 해외문학파의 일원이자 청년 논객으로 활약하면서 당대의 내로라하는 선배 문인들과 거침없이 격돌했다. 이력도 독특하다. 외국문학 전공자가 대개 문필계에 몸담은 것과 달리 김진섭은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에서 10여년간 근무하다가 일제 말기에 경성방송국으로 옮겼다. 그래서 해방되자마자 그대로 방송국 초대 편성과장과 서울대 초대 도서관장을 지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실린 1950년대 고등국어2


슬프게도 김진섭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납북돼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오래도록 살아남았다. 국정교과서 덕분이다. 김진섭의 번역은 고등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에 꾸준히 수록됐다.

가만 생각해 보면 이상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수많은 납북·월북·재북 문인이 반공의 이름으로 철저히 지워졌건만 김진섭만은 줄곧 명성을 누렸다. 이데올로기적 폭력으로부터 김진섭을 지켜낸 것은 해외문학파 동지들이었다. 식민지 시기 문단과 언론계에서 활동하던 외국문학자들은 해방 이후 주요 대학의 외국어 문학과 창설에 앞장섰다. 그들은 대학교수이자 교과서 편찬위원이기도 했다.



국가의 서슬 퍼런 검열에 꽁꽁 묶여 있던 작가들이 1980년대 말에 대대적으로 해금되고 복권되면서 정작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잊히기 시작했다. 시대가 바뀌었고 해외문학파의 권위와 영향력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사실은 또 있다. 김진섭이 번역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독일 작가 안톤 슈나크의 작품이다. 대체 안톤 슈나크는 누구일까.

안톤 슈나크는 1892년생인 춘원 이광수와 동갑내기이니 김진섭에게는 동시대 작가다. 그런데 독일에서조차 기억되지 않아 도리어 이광수나 김진섭에 한참 못 미친다. 게다가 안톤 슈나크는 1933년 아돌프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한 88인의 문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형인 시인 프리드리히 슈나크도 함께 이름을 올렸다. 나치에 적극 가담한 형제 문인이라는 뜻인가.

맞다. 실제로 안톤 슈나크는 두 차례 세계대전에 모두 참전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20대 청년을 뛰어난 전쟁 시인으로 키웠다. 침략의 광기가 절정에 달한 제2차 세계대전 때는 50대에 접어들었지만 다시 전선으로 달려갔다. 안톤 슈나크는 미군에게 붙잡혀 포로 생활을 겪기도 했다.

김진섭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번역한 1936년은 베를린올림픽으로 뜨거운 해였다. 나치 제국의 역량이 총결집된 축전에서 일장기를 단 마라톤 선수 손기정과 남승룡이 월계관을 썼다. 공교롭게도 손기정은 김진섭의 학교 후배였다. 그다음 올림픽은 도쿄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일본이 중국과 아시아 전역을 침공하는 바람에 취소됐다. 우리를 슬프게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김진섭은 안톤 슈나크에 대해서 정말 몰랐을까. 아름다운 독일어 문장에 흠뻑 빠졌다면 설령 몰랐던들 큰 허물이 아닐지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슬픔의 시적 연쇄를 보여준 안톤 슈나크의 문장이 과연 그토록 빼어난가. 적어도 훗날의 독자들은 한 번쯤 의심을 던졌어야 마땅하다.

때때로 번역은 우리를 할퀴고 멍들게 한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나라의 국정교과서로 수십 년간 버젓이 안톤 슈나크를 가르치고 배우고 외워온 역사야말로 부끄러울 따름이다. “이 모든 것이 또한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박진영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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