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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1648년 모스크바 소금 봉기

과도한 세금·학정으로 촉발

모스크바 크렘린궁으로 돌입하는 시위대./위키피디아




1648년 6월 1일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 수도원에서 방금 돌아온 젊은 차르 알렉세이 1세(19세)에 군중들이 몰려들었다. 소금세를 취소해달라는 청원을 위해서다. 접근조차 제지당한 군중은 이튿날부터 행동에 나서 성문을 부수고 크렘린궁으로 들이닥쳤다. 대신들은 스트렐치(친위대)에 사격 명령을 내렸지만 통하지 않았다. 모든 병사들은 명령을 거부하고 더러는 시위 대열에 끼었다. 하급 관료들 일부도 합류해 시위대는 더욱 불어났다. 군중들의 애초 요구는 소금세 신설 취소 뿐이었으나 ‘탐관오리 축출’이라는 요구가 더 늘었다.

차르는 결국 시위대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차르는 각료급 책임자 두 명을 즉각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차르는 스승이자 동서인 보리스 모로조프도 권력 주변에서 몰아냈으나 시위대의 분노는 풀리지 않았다. 폭정을 일삼아 증오의 대상이던 모스크바 시장은 공식 처형이 진행되기 직전 시위대에 붙잡혀 무참하게 살해되고 시신까지 찢겼다. 피를 본 군중들은 가혹한 지주와 관리들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약 1,800여 명이 목숨을 잃고 주택 2만여 채가 불탔다. 모스크바 뿐 아니라 러시아 전역으로 시위가 번졌다.



소금 봉기는 소금세 취소와 병사와 관료의 밀린 급료 일괄 지급 및 인상 등을 확약받고야 가라앉았다. 차르는 공정한 법률을 제정하고 투명한 행정 절차를 마련하기 위한 젬스키소보르(귀족과 성직자, 관료, 상인 대표로 구성되는 신분제 의회)까지 개최한다는 약속도 덧붙였다. 약속은 지켜졌을까. 정반대다. 젬스키소보르는 오히려 자신들의 기득권 강화에 골몰해 봉기 주동자를 체포하고 농민의 삶을 더욱 옭아내는 새 법(울로줴니예·1649년)을 만들었다. 빚이 없는 농민에 국한됐던 ‘새 땅을 찾을 권리’가 이 법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러시아의 악명 높은 농노제가 소금 봉기와 새 법으로 고착화한 것이다.

하층민들도 저항을 계속해 러시아는 17세기 후반부를 ‘봉기의 시대’로 지샜다. 연속된 봉기의 한결같은 원인은 과도한 세금과 학정. 러시아가 여기저기에 세금을 매긴 이유는 세 가지 때문이다. 전쟁과 경제 개발에 막대한 돈이 들어갔다. 17세기 판 러시아 석유·천연가스 격인 모피와 가죽을 얻기 위해 시베리아를 개척하는 데도 투자가 필요했다. 서유럽을 따라잡는 것 같았지만 귀족과 지주, 대상인이 농노를 쥐어 짜내던 ‘러시아 방식’은 결국 20세기 초반 공산 혁명으로 무너졌다. 국민을 짓누르던 소비에트 러시아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인간을 억압하는 체제는 오래가지 못한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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